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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Nov 09. 2024

나의 긴 로망을 앗아간 갑작스러운 유심재 살이

유심재에서의 피난기

생각지도 못한 2주간의 유심재 살기가 시작되었다.

(* 주 : 유심재는 애월에 있는 조그만 농가로 내 글방이자 휴식처입니다)

가끔 한 번씩 자고 가는 곳이었기에, 오랜 시간 머물기 위한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맞이한 장기체류는 곧 불편함. 그 자체였다.

집을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몸소 실감할 줄이야….



얼마 전, 아래층에서 전화가 왔다. 위층에서 누수가 되는 건지 자기 집 천장에 얼룩이 번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자칫 감정싸움으로 벌어지는 주변의 비슷한 상황을 많이 들어 온 터, 바로 설비업체를 불러서 확인했다. 결국 우리 집 욕실의 배관에 문제가 있어 누수가 발생하는 것으로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제 욕실 배관을 교체하고 방수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참으로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다.

사실 양측 모두에게 고의나 과실은 없다. 건축상의 문제로 인하여 위층, 아래층이 모두가 피해를 보는 경우다. 건축주의 문제이나 하자보수 기간이 지났으니 서로가 해결해야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20년이 지났다. 나는 공감을 못 하지만, 남들은 흔히들 이제는 여기저기가 고장이 날 시기가 되었다고 얘기한다. 거의 1,000세대가 되는 아파트 입구에는 하루가 멀다고 매일 안내문이 붙는다. “리모델링, 무슨 무슨 공사로 인한 소음 발생 양해 바람”지나칠 때마다 이런 안내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곳이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이사를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저 남의 얘기로만 들리던 그 일이 내게도 닥쳐온 것이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날, 나는 밤늦게까지 집 안 정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9시부터 공사를 시작해야 했기에, 그 준비를 마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공사 기간이 갑자기 변경되었다. 며칠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작업이 최소 2주간 지속된다는 설명이었다. 내가 출장 간 사이 변경사항이 생겼다. 누수되는 위치가 추가되면서 공사 포인트가 늘어나고, 콘크리트 바닥을 건조하는 데에 시간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사업체에서는 벽면과 바닥을 드러내는 소음이 심한 작업 일정이 끝나면 그냥 집에서 생활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밤에는 들어와서 이곳에서 잠을 자도 된다는 얘기다.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공사 현장에서 생활하라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지만, 일단은 그런가 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 말을 믿고 그냥 외출하듯이 집을 나섰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루쯤은 보낼 수 있기에 유심재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로망이 아닌 불편함이었다.     

유심재에 먹을거리는 비상식량인 라면뿐이다. 별다른 양념거리나 식료품도 없다. 가끔 유심재를 찾는 날, 출출하면 부추전을 해 먹던지, 이것도 귀찮으면 3분 거리에 있는 중국집을 찾는다. 탄수화물이 필요하면 바닷가에 새로 생긴 해장국집을 가는 게 전부다. 주변에 다른 음식점이 없다. 그러니 유심재에 다른 음식 재료가 있을 수가 없고, 하루 세끼를 해결할 곳도 마땅치 않다.

옷도 큰 문제였다. 유심재에 있는 옷들은 대부분이 작업복이다. 유심재에 오는 날은 쉬거나, 작업복을 갈아입고 농사일을 하는 게 전부다. 그러니 일상복이나 외출복 등 갈아입을 여벌의 옷들은 없다.

유심재에서 숙박은 대부분 갑작스럽게 하루 정도다. 일하다가 지쳐서 못 가는 경우, 일을 마치지 못해서 남아있는 경우 유심재에서 잠깐 숙박한다. 그러기에 장기간 지내기 위한 이부자리나 숙박을 위한 기본 준비가 안 돼 있다.      

며칠 전 폭우가 내리는 날, 나는 공사 중인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코니 창문을 열어 둔 상태라 혹시 빗물이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되어서다. 왕복 30~40분 거리이기에 그리 부담되는 거리는 아니지만, 집을 비운 채로 공사를 맡기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공사 중인 집 내부는 보양 작업으로 덮여있고, 안방의 짐들을 한쪽에 모아놓고 쌓아두었다. 생활 도구나 옷들을 찾아낼 수가 없다. 아니 바리바리 쌓아놓은 짐이라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다.

어떤 때는 외출복을 가지러 가고, 어떤 때는 식사 준비하다가 양념거리가 없어서 가지러 가야 했다. 모처럼의 촬영 약속 때문에 챙겨온 카메라는 다른 배터리와 충전기를 가지고 와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긴 옷을 가지러 가고 말 그대로 셔틀이다. 하루하루가 부족한 것으로 채워지는 삶의 연속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마당의 푸르른 잔디와 이슬을 머금은 꽂들이 나를 반겼다.

여름 내내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까만 뿌리를 드러냈던 사랑초가 생기를 되찾고 있다.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피어나고, 유심재는 온통 사랑초 천지다. 이곳은 늘 내게 평온함을 주는 공간이다. 한때 유심재에서의 생활을 로망으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고요함과 평온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이곳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여겼다. 내가 유심재를 찾는 이유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체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 로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불편함이 로망을 대신했고, 단지 피난처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온다는 오래된 진리의 의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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