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삶을 기록할 수 있는 세상

영상채록을 다녀오는 길

by 노고록

세상을 살면서 내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전 먹고살기에 바빴던 시절 우리 생활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기껏해야 한층 멋 내고 찍은 뻣뻣한 모습의 기념사진 한두 장만 있으면 되던 시절, 그것도 1년에 한두 번, 아니면 뭐 아주 특별한 날의 이벤트 정도다. 그렇게 드문 일이고,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때 그 사진들은 집안 가장 깊숙이 보관하는지도 모른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은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가 내 삶을 기록하고자 하는 일이다. 요즘은 블로그에 본인의 일상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거의 일기장이다. SNS를 통해서 거의 실시간으로 동선과 일상을 공개하기도 한다.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 매시간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공개한다. 유튜브를 통해서는 거의 본인의 민낯을 공개하기도 하고, 어쩌면 창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들까지 서슴없이 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TMI일 수도 있다. 대중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경우다. 예전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매체들이 구독자수, 조회수에 목을 매면서, 또는 그 구조를 통해서 소득이 창출되면서 생기는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가 아닌가 한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대중화되면서 생긴 사회변화


기록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기록저장소와 기록방법, 기록수단들이 모두 내 손안에 들어왔다. 휴대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느끼는 감정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글을 쓸 형편이 안 되는 경우 한 편의 영상이나 한컷의 사진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기록한 글, 영상은 별도의 출판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쉽게 대중에게 공개를 할 수 있다. 독자가 생기고 운이 좋으면 수익도 생긴다. 그 까다롭고 어렵다는 작가가 될 수 있고, 또 그리 불리게 된다. 모든 게 쉬워졌다.


최근에는 우리 삶의 흔적을 찾아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참여를 하고 있다.


자료조사나 인터뷰를 통해서 마을의 모습과 그 속 사람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대상을 찾고 섭외하는 일이 어렵다. 처음 인터뷰 요청을 하면 대부분 거부를 한다. "내가 뭐라고.." 성공한 삶이 아니기에, 본인이 유명한 사람도 아니기에 얘기할 것도, 기록할 것도 없다는 투다. "난, 아는 게 없어서.." 성공한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생각이다.


자료조사나 인터뷰를 위해서 방문하는 집, 몇 번의 거부를 하다가 못 이기는 척 찾아서 내미는 사진첩은 너덜너덜이다. 집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본 지도 오랫다는 사진첩은 수십 번, 수백 번 손길이 닿은 듯 다 헤어져 있음에 놀란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사진첩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리 보이지 않는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인터뷰하는 모습


"이거.." 쑥스러운 듯 사진첩을 내밀고는 이내 무관심한 척한다. 이런 쑥스러움은 예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 같다. 많은 세월이 흘러 세월이라는 계급장을 받아서 변해버린 자신의 옛 모습을 들춰내는 일이 어색하기도 하다. 지금 이 모습을 젊은 시절 나에게 보여줄 수 없음도 한몫을 한다. 젊은 시절 가졌던 꿈들을 이루어주지 못함이 지금의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한참 꿈 많던 시절 내 모습을 본다는 것은 지금의 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적통지표이기도 하다.

그래도 사진 한 장을 꺼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 그때..., 이거.." 청산유수다. 든든한 댐에 가두었던 홍수물길이 수문개방으로 일시에 터저나오는 느낌이다. 혼자 이사진 저사진을 꺼내면서 역사를 이야기한다. 일시정지 버튼이 작동불가다. "고만이서 봐.. 야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면 다시 한참이다. 웃다가, 때로는 회상에 잠겼다가, 가끔은 언성이 높아지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발산되는 느낌이다. 그런 인터뷰는 하루에 한 사람이 적당하다. 그 선을 넘으면 내 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다.


내 기억이 채록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도 처음으로 인터뷰어가 되었다.

내 기억이 채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작년 "1970년~1980년대 매일올레시장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제주문화원의 정기 발간집 "기억으로 보는 제주도 생활문화 7집"에 실렸다. 책은 문화원 회원들의 기억을 더듬어서 글로 담고 있다. 나도 작년에 처음올 글을 하나 썼는데, 올해 그 내용을 직접 내가 얘기하는 영상구술도 담겠다는 제안이었다. 내가 마을방송을 하면서 늘 누구를 인터뷰했지, 내가 인터뷰 대상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내용도 A4 10장이나 되는 많은 내용이다. 대본을 정리하고, 얘기 흐름의 구도를 짜고 꼬박 1주일이 걸렸다.

내가 막상 당하고 보니까, 평소에 인터뷰 상대방에게 많이 몹쓸 짓을 했구나 하는 자책감도 느꼈다. 역시 사람은 역지사지로 그 처지가 돼 봐야 안다.


준비는 일주일, 촬영은 1시간이면 족했다. 서귀포항이 보이는 새연교 다리밑에서 50년 전을 회상해 보았다. 마침 내가 앉은 그 자리는 어릴 적 보말과 게를 잡던 펄이 있던 추억의 장소였다. 예전 새섬으로 들어가는 방파제가 있던 자리다. 물이 빠지면 걸어서 섬으로 들어갔다가, 물이 들어오면 방파제로 돌아오지 못하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제는 말끔하게 현대풍의 새연교 다리로 변했다. 나도 그만큼의 구력이 쌓여서 이제 노년이 되었다.

서귀포항에서 영상채록 모습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삶이 지워지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뭔가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지워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제주다움을 지워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영상촬영 에필로그 일부분 발췌)



집을 벗어나면 일상이 아닌 한 사진을 찍는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예전 카메라가 없을 때는 내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눈에 담고 기억하기 위해서 한참 동안을 집중해서 응시를 했다고, 그러나 이제는 카메라를 꺼내서 훌쩍 담고는 떠나간다고....

그리고 그 사진은 갤러리 속 자료가 되고, 내 기억 속에서는 사라진다고, 수긍이 가는 얘기다. 디지털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나는 그 사진을 주기적으로 PC에 옮기고, 분류를 한다. 매년 분류를 하고, 장소별로 분류를 한다. 그리고 한참 후에 몰아서 보기를 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나만의 기록하는 방식이다.


오늘도 몇 장의 사진을 뒤척이면서 몇자를 적어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부처님 오신 날, 넉넉함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