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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중앙로 62번 길의 추억

서귀포를 다녀 오는 길

by 노고록

변화를 얘기할 때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사용한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바다가 되었다는 뜻이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바다가 될리는 없는 터, 불가능을 얘기함인지, 갑자기 빠르게 많이 변함을 얘기하는지 애매하기는 하다. 일반적으로 후자의 의미로 쓰이기는 한다.



종종 서귀포 가는 길, 내가 20여 년을 살던 옛집을 찾아갔을 때 내가 받는 기분이다. 내가 의지해서 옛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 상전벽해라는 말이 떠 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살던 집도 언제 철거되었는지 그 자리에는 전혀 새로운 양식의 상가가 들어서 있다. 나의 활동무대였던 곳들이 매일올레시장에 편입이 되면서 생긴 변화다.


오늘은 특별한 일로 서귀포를 찾았다. 내가 작년에 옛 추억을 더듬어서 쓴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을 영상인터뷰로 기록하겠다는 제주문화원의 요청에 의해서다. 제주문화원에서는 "기억으로 보는 제주도 생활문화"라는 책을 매년 시리즈로 발간을 한다. 작년 7집이었다. 나이가 많은 회원들의 기억을 더듬어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매년 기록하는 작업이다. 나는 작년에 "1970년대~1980년대 매일시장의 추억"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작년 테마는 전통시장이었다. 매일시장은 지금의 매일올레시장의 전신이다. 지금은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그리고 나날이 변해가는 매일올래시장의 모습을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억을 더듬어서 글로 정리를 했다.



서귀포 뒷병디, 내가 살던 동네는 매일올레시장의 북쪽길 지금의 중앙로 62번 길이다.

시장입구에서 서쪽으로 한길까지 200여m가 중앙로 62번 길이다. 그 길 80m 지점에 우리 집이 있었다. 팽나무가 있는 골목길을 낀 돌담집이었다. 1960년대 이전에 지어진 제주의 전형적인 초가집이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지붕을 슬레이트로 개량하고, 흙과 찝을 이용 해서 쌓았던 집축담은 블럭으로 바꿨다. 내가 떠나기 전까지도 동네에는 초가집이 있었다. 말 그대로 됫병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주거지역이었다. 옆 골목 팽나무는 우리 집 지붕을 덮을 정도로 오래되고 큰 나무였다. 밤이면 오소록헌길 잠깐의 데이트장소가 되기도 했다. 여름철 나무 위는 개구쟁이 우리들에게는 스릴감 있는 놀이터가 된다.


이젠 내가 살던 집도, 골목길도 팽나무도 없어졌다.

우리 집 주위에 있던 4채의 집이 모두 사리 지면서 그 자리에 매일올레돈이라는 식당과 주차장이 널찍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옆에 동네 유일의 초가집이 있던 곳과 콩나물 공장이 있던 자리에도 식당과 주차장으로 변했다. 콩나물공장과 초가집 사이 길가에는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주었던 멀구슬나무가 있었는데 온데간데없다. 멀구슬나무는 여름철 동네 매미들이 집합을 하는 장소라 매미를 잡으러 우리가 오르내리던 나무다. 1년에 몇 번 동네 삼촌들이 추렴을 하던 공동의 장소이기도 하다. 든든한 나무그늘이 있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던 장소다.

KakaoTalk_20250617_095036891.jpg 동네어귀마다 있던 멀구슬나무

멀구슬나무 앞에는 어린이 놀이터 겸 공원이 있었다. 꽤 큰 면적에 벤치와 나무, 어린이 놀이시설을 갖추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기에 보기 드문 시설이었다. 공원에는 큰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하얀 철제벤치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공원 가운데에는 원형의 모래씨름장이 있어서 동네 개구쟁이들이 한판이 벌어지기고 했다. 공원이 천주교 복자교회 건물과 붙어 있어서 공을 차다가 울타리를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할 수 없이 월담을 해야 한다. 돌담이 아닌 블록담이기에 발을 딛고 올라설 곳이 없다. 아이들의 무등을 타고 올라서서 넘어간다. 잠시 후 공은 돌아왔는데, 사람을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공이 귀하던 시절이라 반드시 공은 찾아내야 한다. 월담을 한 친구는 할 수 없이 정문을 통해서 나오다가 당시 외국인 신부님한테 걸리곤 했었다.


우리 집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는 골목길이 있었다. 안쪽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올레다. 동쪽 골목길은 짧았다.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고, 당시에는 낯설었던 왕국회관이 있었고, 옆에는 쌍둥이 형님네가 살았다. 뭔가를 할 수 없는 장소였다. 반대인 서쪽 골목길은 아주 길었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집앞길(지금의 중앙로 62번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면서 더 이상 놀이를 할 수 없게 되자 비포장인 골목길로 들어왔다. 당시에는 땅에 구멍을 내던지, 뭔가는 그려야 놀이를 할 수 있는 시대였다. 자치기, 구슬치기, 방치기가 모두 그런 놀이였다. 골목길에는 항상 그런 놀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또 하나의 놀이터는 골목길에서 서쪽으로 집을 하나 건너면 나오는 동네 사거리 모퉁이에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멀구슬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동네 꼬마들이 놀기 알맞은 크기의 공터였다. 하도 애들이 이런저런 놀이를 하면서 다져진 곳이라 땅도 평평하고, 잔돌이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바로 공터옆에 사는 후배의 아버지이자 학교 선생님이 문제였다. 놀만하면 나와서 판을 깨고 집에 가서 공부하라고 난리를 피웠다. 나와서 얘기를 하면 도망가고, 들어가 버리면 다시 모여서 시끄럽게 굴다가 몇 번 잡혀서 혼을 나고, 집으로 끌려가서 부모님에게 강제 인계되기도 했다.

1979년 사진.png 1979년 우리 동네 지도(출처: 제주지리정보포탈)


선생님네가 사는 집이 3층 스라브 건물로 바뀌면서, 1층에는 구멍가게가 생겼다. 동네 유일의 구멍가게다. 그 구멍가게의 단골은 바로 앞에 있는 고등학교의 학생들이다. 쉬는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월담을 해서 넘어온다. 당시 학교는 아침에 등교를 하면 수업이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학교에 식당이나 매점도 없었다. 군것질을 하기 위해서는 화장실 옆 쓰레기장에 허술한 담을 넘어왔다. CCTV도 없는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동네에는 심방도 살았다. 동네에서 가장 널찍하고 큰집이었다. 정원의 개념보다는 마당에 꽃밭이라는 개념이었던 시대, 꽤 큰 꽃밭이 있었다. 당시에는 무당이나 굿이라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대라 그분들은 무척이나 바빴던 것 같다. 부부가 아주 큰 굿을 하곤 했는데 머리에 고깔모자를 쓰고, 북과 장구를 치면서 칼춤 추는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겁이 났다. 그 집 아들은 선배고 딸은 후배라 자주 들렀다. 특히 종종 가져다주곤 했던 하얀 흰떡이 생각난다. 솔변, 절변하고 백설기다. 그때 우리는 신방떡이라고 불렀다. 먹을 게 없던 시절 종종 가져다주는 떡은 무슨 이유에서 생긴 지는 모르지만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러나 맛은 없이 심심했다.


그 집 앞쪽은 기다란 남주고등학교 뒤쪽 울타리다. 돌담으로 돼있었고, 울타리 안으로는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어린 시절 키 작은 내가 보기에는 엄청 큰 나무였다. 돌담 바로 붙어서 도랑이 있다. 지금 말하면 하수구인데 당시에는 하수구를 만들고, 뚜껑을 덮는 게 아니다. 물이 흐를만한 곳에 도랑을 파면 그게 하수구다. 보통은 도랑이 아닌 고랑이라고 불렀다. 아카시아 잎을 따려면 돌담에 붙어서 따야 하는데, 도랑 때문에 딸 수가 없다. 키가 아카시아 나무에 미치치 못했다. 가끔 휘늘어진 아카시아 나무가 있어서 길에서도 잎을 딸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냥 지니 칠 수가 없다.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꺾어서 "월화수목금토일"을 하면서 잎을 하나씩 떼어내는 혼자만의 게임을 한다. 마지막으로 가운데잎이 남아서 행운이 있기를 빌기도 했다.

하얀 아카시아 꽃이 필 때면 향기가 진동을 한다. 잎도 이쁜데 꽃도 참 이쁘다. 꿀벌도 많아서 아카시아 꿀을 만들기도 했다. 이제 그 자리는 공영주차장 들어서있다. 학교를 다니던 추억, 학교에서 놀던 추억이 모두 사라졌다. 내가 찾아갈 고향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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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향기로움을 주던 아카시아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유는 정리되지 않은 뭔가를 고향에 남겨놓고 나왔기 때문이다.

굳이 찾는다면 그건 추억이나 정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자연일 수도 있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그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게 남아있다면 다행이고, 없어도 할 수 없다. 추억은 내 것이지만 고향은 내게 아니기 때문이다.


노마드인 현대 도시인들에게 고향의 의미가 달라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상전벽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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