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이 파는 것은 지식인가? 지혜인가?
나이 든 사람들이 병원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모르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환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다.
아는 게 병인지, 모르는 게 약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이대로만 살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다.
요즘은 글을 쓰고 이런저런 워드 작업을 하느라 모니터 앞에 붙어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터 눈이 침침하고, 가끔씩을 따끔거릴 때도 있어서 걱정을 하기 시작한 지가 거의 1년이 다 된 거 같다. 한 2년 전쯤인가 종합적인 눈 검사를 받았다. 백내장도 안 보이고 아직은 건강하니 조심만 하라는 진찰을 받는 적이 있기에 별 다른 걱정은 없었다. 오늘 마침 마지막 작업을 마치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연말이 가기 전에 안경도 새로 바꾸고 새로운 기분을 내고 싶다길래 아내가 일단 안과에 가서 진찰을 받기를 권유했다.
내가 사는 곳은 택지개발로 조성된 지가 20여 년이 넘는 도농복합지역이다. 좁은 지역에 인구가 밀집되다 보니 상가들이 복작복작하다. 덩달아서 의원급 병원과 약국들도 수두룩 하다. 의원들은 거의 모든 진료과목들이 다 있는데 안과와 피부과, 산부인과만 없다. 피부과 산부인과는 의원급 병원이 희귀한 요즘이라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젊은이들이 많은 동네라 안과는 수요가 많아서 있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우리 가족 5명이 전부 안경을 쓴다. 나를 빼고 4명은 전부 현대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안경을 벗었지만 나는 지금도 안경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 집에서 가장 필요한 진료과목은 안과였다. 그동안 애타도록 기다리던 안과가 작년에 우리 동네 생겼다. 언젠가 아내 진료차 따라갔던 의원은 산뜻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에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나도 언제 한번 진료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병원, 큰 대기실이 무색할 정도로 텅텅 비었다.
아직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며 접수대를 들렀다.
신분증을 내밀자마자 대뜸 "시력 검사 할 건가요?"라고 간호사가 질문을 했다.
여태까지 다닌 안과에서 시력검사는 질문 없이 의례적으로 했다. 선택사항도 아니었는데, 그 여부를 묻는 게 첫 질문이라 당황하기는 했지만 한다고 대답을 했다.
"검사를 하면 비용이 5~6만 원 나오는데요.." 옆에 있던 다른 간호사가 말끝을 흐리면서 얘기를 하다 만다. "예, 시력검사하는데 돈이 들어요, 그렇게 많이요?" 의문이 생긴 내가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보자
"백내장 등 종합검사를 하는 것이라..."라고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아니 그건 시력검사가 아니고 눈 검사네요, 한 2년 전에 모두 했어요.."라고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사실 나는 시력검사라고 하길래 안과에 가면 의례적으로 하는 방법, 한쪽눈을 막고 앞에 있는 뭔가를 부지런히 읽으면 되는 그런 것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이름이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시력검사를 안 하신데요.." 진찰실에서 이름을 부르자 들어가는 나를 보고 마치 고자질을 하듯 간호사가 의사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불량품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선과장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슬쩍 불쾌해지기 시작했고,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을 직감했다.
눈이 좀 침침해서 왔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의사라는 사람은 "흰머리가 나는 만치 백내장이 옵니다"라는 말을 던지면서 현미경 같은 기계를 내밀었다. 좌우눈을 한 번씩 찍더니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를 하려는 듯했다. 수술은 하지 않겠다고 하니 백내장을 더디게 하는 약을 처방하려고 한다고 했다.
"아니 시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도 알아보고, 이 안경도 맞는지.." 나의 궁금증을 다 말하기도 전에 끝는다.
"그러니까 시력검사를 해야 한다고요, 비용 때문에 그러세요.. 머리가 하얘지는 만큼 백내장이 옵니다.. 백내장 초기예요.." 머리가 하얀 사람이 오면 무턱대고 시력검사를 받고 당연히 백내장 수술을 해야 하는 듯 한 분위기다. 백내장 초기라는 의사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많아야 40대를 넘지 않은 정도의 젊은 여의사였는데 말하는 게 영 4가지가 없었다. 환자가 얘기를 하며 듣고, 설명을 하고 처방을 내려줘야 하는데 그냥 수술얘기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너는 머리가 하얀 사람이니 백내장이니 수술해라는 의미로 밖에 들이지 않았다.
"재작년 정도에 이미 다 검사를 했고,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다니던 곳이 있는데 동네에 새로 생겼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간청하듯 상황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여긴 정보가 없고, 머리가 하얀 만큼 백내장이 왔으니... 검사를.." 또 하얀 머리 타령이다.
나는 머리 염색을 하지 않았는데 흰머리는 꽤 있는 편이다. 염색을 하지 않는다. 곱슬머리에 반백이라 노년의 자유스러움과 멋으로 알고 그냥 다닌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길래..
더 이상 진행이 된다며 거친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됐어요"라는 말을 하고 진찰실을 나왔다. 한 1~2분여 걸린 시간이었으나 마음은 몹시 불쾌했다. 나오려는 나를 붙잡고 간호사가 진찰료를 내라고 한다.
"11,300원" 응,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방금 의사가 내 눈을 본다고 진찰실에서 현지경으로 사진 2장을 찍은 비용이란다. 그리고 의사가 내게 건넨 말 한마디, "흰머리가 있으니 백내장"이라는 말의 값인 초기진찰료가 18,410원(공단부담금 포함)이라고 적혀있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뺨은 내가 맞았는데, 때린 사람 손이 아플지도 모르니 병원비를 내주는 그런 기분이었다.
모처럼 벼르고 별러서 잡은 일정이었는데, 이리저리 기분만 상했다.
"안 하던 짓 하면 동티 난다"는 제줏말이 있다. 하던 대로 살라는 의미다.
가는 연말을 시원하게 보내고 새로운 기분을 내려했던 내가 문제가 있었나 보다. 돌아서는 길이 씁쓸하다.
"흰머리가 나는 만치 백내장이 찾아온다는 말" 어떤 의미의 말인지 짐작은 되나 그것 때문에 불편해서 찾아온 환자에게 대뜸, 그것도 지식이라고 할 얘기인가? 세월이 흘러서 머리에 쌓인 훈장인 눈덩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환자를 공감할 수 없다면 어떻게 환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치료할 수 있겠는가?
작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구었던 의사증원 파동, 자기네만 있으면 된다고 파업과 진료거부로 맞선던 의사들을 선명하고 똑똑하게 기억한다. 자신들이 하는 말의 뜻과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