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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Oct 26. 2022

취향의 자리를 찾아서

프롤로그

파도가 조각한 기암괴석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달리다 잠시 차에서 내려섰다.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우리를 노려보던 캥거루 들은 인사를 건네듯 제자리 뛰기를 하다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졌다. '껌뻑' 눈을 감았다 뜨면 눈동자 가득 푸른 바다 위를 서퍼들. 우린 지금 호주에 있다(여기까지가 나의 꿈속 호주 신행인데 당시의 대한항공 CF와 블로그에서 봤던 내용이 합성되어 펼쳐졌다.)

아무리 신혼여행이라지만 우리 형편 상 좀 과하지 않나 싶었지만, 호주에서 1년을 살다온 니콜은 자신만만하게 '나만 믿어'를 외쳤다. 동기부여 전문가이자 타고난 긍정녀. 나 같은 부정형 인간에게 안성맞춤인 아내. 이 보다 더 잘 맞을 순 없다!




몇 번의 기내식을 소화시키고 몽롱한 정신상태로 도착한 멜버른의 호텔. 창문을 열면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 그런 거 없고 창에서 2m 앞을 칙칙한 시멘트 벽이 가로막고 있다. 호텔 밖 뒷골목에서는 비니를 깊게 눌러쓴 마약상이 다가와 작은 지퍼백에 든 물건을 건넬 것만 같다. '이제 시작인데 뭐, 내일부터는 분명 내가 상상했던 호주가 펼쳐질 거야.' 작은 욕실에서 바득바득 몸을 씻고 잠들기 전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좌) 호텔가는 길, 우) 호텔 객실 전망


신행 첫날밤 밤새도록 나이트메어의 프레디가 나를 쫓아왔다. 잠을 깨려고 별짓을 다해도 눈꺼풀은 천근만근,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호텔 욕조에 누워있다. '휴~ 꿈이었구나' 뜨끈한 물속에 천천히 누워 얼굴을 묻는 순간 가랑이 사이로 갈고리 손톱이 쑤욱! 올라온다. '아이 XX! 쌍욕을 날리며 잠에서 깬 나는 잠시 후 악몽의 주체를 알게 되었다.

'찌익 끼기긱~~ 끼기긱~~ 찌익 끼기 기기 긱~'

환기구 저편에서 들려오는 프레디, 아니 쥐들의 축제. 프레디가 손톱으로 철판을 긁을 때 나던 소리와 너무 닮아서 등가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호주는 야생의 천국이고 바퀴벌레도 주먹만 하다던데 아무리 그래도 호텔에 쥐라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결혼은 우리가 했는데 왜 지들이 파티를 벌이고 난리지? 무슨 라따뚜이도 아니고 말이야. 실낱같이 얕던 나의 꿈은 '찍!' 소리와 함께 끊어져버렸다. 




사실 이 비극의 프리퀄은 공항 면세점에서 시작된다. 새로 산 메모리카드는 우리의 구형 카메라(니콘 쿨픽스995)와 호환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구매한 카메라는 멜버른에 도착하자마자 떨어뜨려 케이스가 '쩍'하고 벌어졌다. 다행히 기능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기분은 회복하기 힘든 스크레치를 입었다. 

피박에 광박 격으로 아내는 집에 눈을 두고 왔다. 한국에서는 아무 안경점에서 시력만 말하면 렌즈를 살 수 있지만, 호주에서는 정확한 커브 값까지 알아야 살 수 있었다. 이대로 장님처럼 약쟁이들이 나올 것 같은 거리를 배회하다 쥐들의 파티를 경청하며 신행을 마치는 건가. 렌즈를 놓고 온건 니콜인데 내 눈앞이 캄캄했다.


"여보세요. 거기 XX 안경점이죠. 이희선 이름으로 고객의 시력과 커브 값 수 있을까요?"

"어디시죠? 국제전화로 찍히는데, 고객정보는 함부로 가르쳐 드릴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지금 호주로 신혼여행을 왔는데 그걸 모르면 렌즈를 살 수가 없데요. 개인정보 확인해 드릴테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호... 호주요?"

천만다행으로 한국의 안경점에 전화를 걸어 렌즈를 살 수 있었지만, 일을 치르는 동안 하루가 날아가고 카메라로 인해 벗겨진 마음의 생살에 굵은소금이 뿌려졌다.


"근데 너 지금 쓰고 있는 그 안경은 뭐야?"

"이... 이건 독서용."


이후 일정은 주로 니콜의 추억 여행 코스를 따라 이동했다. '스트롱 걸'이란 닉네임으로 농장일을 하는 동안 머물렀던 에메랄드 백패커, 시드니로 와서는 청소 일을 하며 머물 던 '두리 하우스'와 유통기한이 다가올 때마다 고기 파티를 했다는 '코리아 바비큐'. 니콜은 활짝 웃는 얼굴로 업소 사장님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셔터를 누르며 함께 웃었지만 가슴 한편에는 꿈꾸던 신행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라면과 맥주로 피로를 풀던 날 눌러두었던 불만사항이 취기를 빌어 터져 버렸다.


"이건 아무리 자유여행이라도 너무 한 거 아냐?"

"숙소는 환락가 한가운데 도미토리 룸, 맨날 서브웨이 샌드위치만 먹고 알바 사장님 만나 인사하고 사진이나 찍고, 아직까지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커녕 캥거루 한 마리를 못 봤잖아. 내가 자기 추억의 장소 관람하러 신혼여행 온 거야?"

"오빠, 그레이트 오션 로드 거기 가봐야 별 거 없어."

"그냥 바다 위에 돌덩어리 몇 개 떠 있는 거야." (호주 관광청에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되어있다) "캥거루, 코알라, 그런 거 봐봐야 별 재미없어. 그냥 이렇게 일상처럼 하는 여행이 좋아 난." (일상처럼 지내려고 10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몇 백만 원을 쓰다니)


거의 매일 밤 라면과 맥주를 먹었다. 한국에서 보다 신라면을 많이 먹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 우리는 안 맞는다. 적어도 여행에 있어서는 극과 극의 취향이다. 이보다 잘 맞을 순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최소한 여행에 있어서는 '우린 정말 안 맞아'였다.

여행에 있어 다다익선을 추구하는 나는 일단 갔다면 뽕을 뽑아야 한다. 중간에 쓸데없이 시간이 비는 걸 못 참는 타입이다. 스노클링, MTV 타기 같이 몸을 써서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고 숙소에 돌아와 다리가 뻐근해야 잘 놀았구나 싶다. 반면 니콜의 여행은 로컬스럽게 보내기. 하루 종일 숙소에서 뒹굴다 근처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 사 먹고 공원 가서 책 읽는 것을 최고라 여긴다. 같이 살던 룸메가 '오징어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는데 하루 종일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지어줬단다.


매실청이 설탕물의 단계를 넘어 진정한 약성이 생기려면 적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3개월만 지나면 먹어도 된다지만 무해를 넘어 유익한 것이 되려면 묵묵히 항아리 속에 잠겨 있어야 한다. 그전에 먹는 것은 그저 맛 좋은 설탕물인 뿐이다. 

호주 신행이 유익한 것으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평생에 한 번, 다시는 호주에 갈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블로그 입력창에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폴더를 뒤적거리 던 중 빙긋이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질리게 먹던 서브웨이 샌드위치, 한 모금 홀짝거리고는 동시에 커진 눈을 마주치게 했던 카푸치노, 매일 밤 먹던 컵라면과 호주의 맥주들, 벼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겁먹었던 2층 침대. 

별것도 아닌 것들, 지극히 시시하고 사소한 기억에 웃음 짓고 있었다. 속상했던 기억은 항아리 속에서 숙성되면서 무해를 넘어 유익한 것들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 분하지만 인정할게. 당신의 여행법도 나름 훌륭해. 고생했던 여행이지만 고생했기에 기억에 남는 것 같아. 하지만 거기에 더해 단순하게 행복했던 기억도 있었으면 좋겠어. 약성이 생기길 기다리기엔 내 인내심이 종잇장 같아서 말이지.'

여행의 추억은 건 별 결재라 매번 새롭게 반복된다. 비슷한 패턴의 여행을 하고는 속상해하다 웃음 짓는 도돌이표 같다. 패키지여행은 싸울 일이 없어 좋았지만 시간을 두고 숙성되는 맛은 없었다. 즐거웠던 건 분명한데 뚜껑을 열자마자 휘발되어 버리는 느낌.


아이가 생기고는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인 스케줄로 움직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약으로 작용했다. 한 달 간의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아이를 가운데 두고 교대로 바티칸 시티 투어를 다녀왔는데, 오롯이 그날의 분위기에 취할 수 있었다. 오로지 내가 관심 있는 것만 보고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패스. 그렇게 온몸의 감각으로 담아 온 것들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여전히 우리는 안 맞는다. 바다를 좋아하는 난 하루 종일 멍 때리며 기타나 튕기다 오고 싶다. 수민이도 바다를 좋아하길 바랬지만 불행히도 엄마를 닮아 도시 파다. 서울 홍보대사도 아닌데 '아이 러브 서울'을 입에 달고 살며, 겨우 1년 살아놓고 뻔뻔하게 서울이 고향이라고 한다. 

제주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가족의 모습은 우리에게 없다. 하나의 테이블에 셋이 앉아 한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한 사람은 책을 읽고 한 사람은 게임을 한다. (가끔씩 그림을 같이 그릴 때도 있긴 한데 그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안 맞는 것들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만들어낸 퍼즐이 지금의 우리다. 꿈꾸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르지만 한 항아리에 담겨 진하게 발효되며 깨닫는 중이다.


여전히 안 맞지만 잘 맞는 때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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