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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Oct 26. 2022

타이타닉호의 이코노미 인들

취향의 자리를 찾아서 / 퀸제누비아호

배를 탔다. 거대한 배. 배는 비행기와는 다르다. 일단 느리다. 비행기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5시간을 가야 한다. 24노트. 시속으로 치면 44km 정도. 물론 나보다는 빠르지만 느린 건 분명하다. 대신 크다. 총길이 170m, 1284명이 탈 수 있다. 그것도 차를 싣고서.

축구장 만한 배가 많이 싣고 느리게 가다 보니 여정 자체가 하루의 일정이다. 배 안에는 편의점에 식당은 물론 파리바게트까지 있다. 어디선가 술 취한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노래방도 있다. 배는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아저씨는 노래를 시작하셨다. 대낮부터 <나 어떡해>를 열창하는 걸 보면 사는 게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객실은 이용요금에 따라 무려 여덟 가지로 분류된다. 여덟 가지 등급 중 마지막. 이코노미 객실이 왠지 자연스럽지만, 썩 기분 좋진 않다. 로비에서 객실로 향하는 계단은 영화 속 타이타닉호의 연회장 계단을 연상시킨다. 물론 클래식하고 묵직한 목조형태의 디자인은 아니지만 나선형의 계단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은 동일하다. 영화에서 잭 도슨이 계단을 통해 상류사회로 들어갔다면 우리는 반대로 이코노미 세상에서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로비로 나온다. 이 점은 다행히 영화와 다르다.



객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니콜은 멀미약을 먹고 잠들었다. 쑴도 같이 먹었지만 라면에 대한 애착은 잠을 이겨냈다. 편의점에는 이미 배고픈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배에  타기 전에도 충분히 먹을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이 시간을 위해 참아낸 모습이다. 가만히 둘러보니 라면을 산다 해도 마땅히 먹을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미리 예습이라도 하고 온 건지 취식 공간에는 피크닉이라도 온 것처럼 돗자리까지 깔려있다. 작전 변경. 쑴이 줄을 서 있는 동안 눈에 불을 켜고 빈자리를 찾았다. 다른 곳은 이미 늦었고 6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는 여성분을 포착,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본다.


"저기, 일행이 없으시면 여기 같이 앉아도 될까요."

멘트가 뭔가 좀 잘못된 거 같다. 뭐지 이 아저씨? 작업 들어오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아, 저... 아이랑 라면 먹으려는데 자리가 없어서요."

캐릭터가 그려진 도시락 가방을 슬쩍 들어 거짓이 아님을 강조했다.

"네, 괜찮으니 앉으셔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긴 기다림 끝에 튀김우동을 획득한 쑴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리를 획득한 아빠와 튀김우동을 얻어낸 딸, 승리감에 도취되는 순간이다. '호로록~ 호로록~' 경쾌한 면치기 소리에 마음이 안정되고, 그제야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휴게실은 물론이오 식당에서 복도에 이르기까지 의자가 있는 곳은 이미 돗자리가 깔려있다. 의자가 없는 곳에도 자리를 펴고 누운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19 때문에 공용 객실에 함께 있는 것이 꺼려지기는 하겠지만 막무가내식 자리잡기는 휴가의 흥을 떨어뜨렸다. 라면을 폭풍 흡입한 쑴은 그제야 약기운이 도는지 엄마를 찾는다.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 배 안을 구석구석 탐험하기 시작했다. 여행으로 들뜬 분위기가 느껴지던 펍, 바다를 보며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선셋 테라스도 좋았지만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은 '마사지 라운지'다.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늘 어깨가 굳어 있다. 굳은 어깨는 범위를 넓혀 목 뒤를 타고 올랐다. 신경관이 압박된 탓에 자려고 누우면 왼쪽 뒤통수에 심장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두근두근 거린다. 몸이 이렇다 보니 집에 있는 마사지 도구는 여섯 개가 넘는다. 다이소부터 코지마까지 두루두루 섭렵했다. 세 번째 어깨 안마기를 사면서 이럴 거면 그냥 안마의자를 사는 게 낮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사지 샵에서 장인의 손길로 몸을 풀어 준다면 좋겠지만 한 번에 5~6만 원씩 하는 곳에 갈 바에 3만 원짜리 안마기로 뽕을 뽑는 게 낮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찜질방에 가면 늘 안마의자 두 번 정도는 기본으로 돌려준다. 안마의자를 보자마자 굳은 등판은 조건반사 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모두 같은 마음인 건지 빈자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잠시 후 이 신성한 마사지 라운지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안마기는 멈춰있는데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코를 고는 걸 보면 작동을 멈춘 지 한참 된 것 같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탓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벽에 안내문이 붙어있다.

"안마기에서 잠을 잠지 말아주세요! 안마기를 3회 이상 연속으로 이용하는 것을 삼가해 주세요."

경고문이 붙어 있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순간 혈압이 오르면서 민감한 뒤통수가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기, 아저씨."

코를 골던 아저씨가 호흡을 멈추자 일순간 정적이 감돈다.

"저 다 쓰신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 주시면 안 될까요?"

아저씨는 불쾌하다는 듯 잠시 노려보더니 말했다.

"이거 고장 났어요."

아저씨의 굵은 종아리 밑에 붙은 종이에는 빨간 글씨가 적혀 있었다. '고장'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몰랐네요."

졌다. 완벽한 패배. '고장 났어요'라고 할 때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던가? 속상하고 억울하다.


일단은 일보 후퇴. 식당에서 떡꼬치를 하나 사서 질겅질겅 씹었다. 홧김에 샀는데 의외로 맛이 좋다. 테라스에 나가니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섬들은 물안개가 감싸고 있어 희미했다. 풍경이 주는 위로에 마음이 차분해져 다시 마사지 라운지로 향했다. 다행히 빈자리가 보인다. 떨리는 손으로 천 원짜리 두 장을 넣었다. '지이잉' 지폐가 빨려 들어가고 안마의자는 행복할 준비를 하라는 듯 의자를 젖혔다.    

창밖을 유유히 흐르는 물결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릴랙스~ 릴랙스~ 주문을 외는 것 같다.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15분씩 세 번을 돌리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살짝 잠이 들뻔했다. 순간 벽에 붙어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3회 이상 연속으로 이용하는 것을 삼가해 주세요"

내가 그 아저씨보다 잘한 게 뭘까. 뭘 그렇게 모범시민도 아니면서 혈압을 올린 걸까. 몸은 시원한데 마음은 부끄러웠다.


식당에서 니콜과 쑴을 만나 시간을 보내다 퀸제누비아 호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최상위 객실인 VIP룸은 50만원. 깨끗한 침대와 소파, 욕실에는 스파와 비데까지. VIP라운지에는 성능이 훨씬 좋아 보이는 전용 안마기까지 있다.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VIP룸을 이용할 일은 없겠지만 괜스레 의기소침해진다. 그곳에서는 안마기 때문에 기분 상할 일도 아무 데나 자리 펴고 누운 사람들 보며 인상 쓸 일도 없겠지. 잭 도슨은 상류사회 연회장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나는 한 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고작 안마기 하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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