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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18. 2016

 ‘룸나무’와 ‘급식충’의 언어사회학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29)

1     


‘요즘 아이들’에 대한 어느 두 사람의 말부터 들어 보자.     


“요즘 아이들은 사치를 좋아한다. 버릇이 없고 권위를 조롱하며, 어른을 존경하지 않고, 일하고 행동하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요새는 어른이 방에 들어와도 일어서지 않는다. 부모에게 말대꾸하고 수다스럽고 밥상에서 밥을 게걸스럽게 먹고 스승에게 대든다.”
“열 살하고 스물세 살 사이의 나이는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 그동안에 차라리 잠이나 자든가. 그 나이 때에 하는 일이라고는 여자를 임신시키거나 조상을 모독하거나 도둑질하고 쌈질하는 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성미 까칠한 ‘요즘’ 어른이 내놓은 말들이 아니다. 2400년 전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70~기원전 399)와 500년 전 중세 시대를 살다 간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가 한 말이라고 한다.   

  

교사들은 교육의 황금기를 즐겨 말한다. 대개 ‘요즘 아이들은’으로 시작된다. ‘옛날 아이들은’으로 끝난다. 그는 무오류의 교육자가 된다. 초임 시절의 그는 지고지순하다. 훌륭하고 뛰어나 아이들을 잘 가르쳤다. 지금 그가 힘들어하는 것은 그 자신 때문이 아니다. 못되고 못난 ‘요즘 아이들’ 때문이다.     


2     


‘요즘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청소년 혐오 담론이나 청소년 공포증을 표상한다. 몇몇 신조어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중2병’. 청소년 혐오 정서를 보여주는 최신 신조어 중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청소년기 특유의 정서적・행동적 특성을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청소년 일반의 언행을 병리화하는, 그리하여 그들을 손쉽게 통제와 관리가 필요한 환자 집단으로 재정의하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는 말이다.


‘급식충’. ‘급식’과, ‘벌레’를 뜻하는 한자 ‘蟲(충)’이 합해진 말이다. 급식을 제공받는 초・중・고등학생들을 경멸적으로 지칭한다. 보편적인 무상의무급식제도가 널리 퍼지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 없이 복지 수혜를 받는 ‘기생적인’ 존재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중학생은 ‘중급식충’, 고등학생은 ‘고급식충’이다.


‘등골 브레이커’. 청소년들이 부모들 등골을 부수는 존재라는 뜻이 담겨 있다. ‘급식충’이 풍기는 뉘앙스를 두루 공유한다. 경제적 미자립 상태인 청소년들이 부모의 부양에 의존해 기생적인 생활을 해 나가면서도 부모의 고마움을 잘 모르는 배은망덕한 존재라는 의도를 담아 쓰는 경우가 많다.


‘룸나무’. 주로 여성 청소년에게 사용된다. ‘룸살롱’과 ‘꿈나무’가 결합한 말이다. ‘창녀’는 남성들이 비청소년 여성을 비속어적인 의도를 담아 비난하고자 할 때 쓰는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여성 청소년을 예비 성판매자로 비하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 ‘룸나무’다.       


3  

   

‘요즘 아이들’ 담론은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거세한다. ‘요즘 아이들’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면 교실이 거대한 획일성의 공장이 된다. 모두가 공부를 잘 해야 하고, 모두가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모두가 꿈을 가져야 하고,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모두가 적극적이고 자기주도적이어야 하고, 모두가 창의적이어야 하고・・・.


이외에도 우리는 ‘모두가’로 시작하는 목록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들은 ‘요즘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많은 나라들이 학교의 억압적 이미지를 지우고 배움의 주체성을 강조하려고 하고 있지만, 일정한 연령이 되면 모두가 학교에 와서 오랜 기간을 나이에 따라 공부를 해야 하는 이 시스템을 유연하고 개방적인 체제로 바꾸지 않고는 죄수의 이미지를 탈색할 수 없다.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일정 연령의 아이들을 한 교실로 모아 같은 내용을 배우게 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은 어떠한 자율성이 그 안에서 보장된다고 해도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 정용주(2016), 나이주의와 교육, <오늘의 교육>(제34호, 2016년 9・10월호), 교육공동체 벗, 74쪽.     


‘나이주의(ageism)’가 ‘요즘 아이들’ 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이주의는 나이에 따른 차별, 그리고 나이에 따라 사람을 규정하며 사회적 규범을 요구하는 제도나 이데올로기, 넓게는 사회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아래 ‘나이주의’에 관한 내용은 공현(2016), 나이주의, 왜?, <오늘의 교육>(제34호), 교육공동체 벗, 11~14쪽 참조] 1970년대 미국에서 제안된 개념이었다. 당시에는 노인에 대한 차별을 가리킬 때 쓰였다고 한다.


최근의 청소년운동 분야에서는 나이주의가 청소년 억압의 근간이 되는 이데올로기이자 사회 구조이며, 청소년만이 아니라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고 본다. 이는 현대 국가의 특징과 관련된다. 현대 국가는 국민을 ‘관리’한다. 나이를 정확하게 따져 이에 따라 각종 제도를 만든다. 연령에 따라 교육, 취업이나 승진, 혼인, 출산이나 육아 등 생애 주기 틀에 따른 개인적・사회적 책무를 부과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미숙한 아동에 대해서는 학교를 통한 도제교육과 일시적 노동이 유예를 부여하고, 나이 든 노인에 대해서는 ‘늛음=무능’으로 도식화하면서 정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노동으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배제시켰다. 이는 생산성을 기준으로 특정 연령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문화로 연결된다. (중략)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나이에 따른 구분은 학습자의 현재적 권한과 책임을 과거와 미래로 분산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적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제거될 때, 개인은 늘 현재의 삶을 살지 못하며 자기 삶에서 무책임한 존재가 되며,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타자와 제도의 지배에 쉽게 노출된다. - 정용주(2016), 위의 글, 77쪽.     


4     


시대와 사회마다 고유의 아픔과 어려움이 있다. 그 시대와 사회의 자장권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고유한 배경과 경험을 안고 교실에 들어선다. 그래서 교실은 작은 사회가 된다.


옛날 아이들이 요즘 아이들보다 얌전하고 말을 잘 들었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없다. 요즘 아이들이 옛날 아이들보다 개인주의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생각 또한 이유 없는 ‘풍문’에 불과해 보인다.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어떤 편견의 가닥에 묶여 있는 건 아닐까.


교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수시로 살펴야 한다. ‘이상적인’ 아이란 없다. 교사가 갈구해야 하는 것은 ‘이상적인’ 아이가 아니라 그 스스로 아이들 앞에 ‘이상적인’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영국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C%8C%EB%A6%AC%EC%97%84_%EC%85%B0%EC%9D%B5%EC%8A%A4%ED%94%BC%EC%96%B4)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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