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학교를 향한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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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이자 독일 카셀대학교 교수인 하인츠 부데는 독일 사회학자 테오도르 가이거(1891~1952)가 쓴 <독일 국민의 사회적 계층>을 사회구조 분석의 고전으로 평가한다.[아래 이 책과 내용에 관한 것은 하인츠 부데(2015), <불안의 사회학>에서 빌려왔다.] 이 책은 나치가 전당대회를 열었던 바로 전날 밤에 출간되었다. 부데 교수는 가이거가 쓴 책을 통해 나치로 대변되는 전체주의가 어떤 사회적 배경 속에서 출현했는지 살피고 있다. 그 맨 첫 자리에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이거는 이 책에서 당시 독일인들 사이에 퍼진 억압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사회적 인정의 상실, 자신들을 철저하게 지키고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지배적이었던 사회를 묘사했다. 가이어의 묘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다양했다.
소상인들. 그들은 개인주의적 경쟁 체제 중심의 경제체계를 거부하는 사회민주적인 소비단체들을 증오했다. 가내 수공업자들. 작은 땅을 소유한 채 각자 일하며 광적인 폭동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짧은 머리의 젋은 사무직원들. 사람이 기계에 대체되는 산업합리화 과정에 위협당하면서도 멋진 남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말단 공무원들.
이들이 가진 권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급료와 직책이 말해주는 각자의 지위가 억압받을수록 그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더 많이 노력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과시했다. 하인츠 부데가 보기에 가이거가 묘사한 이들은 모두 당시 독일 사회상의 일부였다.
그들은 짓밟히거나 홀대받으며 가장자리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부데는 이런 상황에서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줄 아는 사람이 사회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가이거를 인용하여 히틀러에게 권력이 넘어가기 1년 전에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전위성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했다.
이들 젊은 세대는 역사에서 하차하여 자신을 민족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했고, 사회에 동요를 일으키는 불안을 새 시대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우리는 오늘날, 바로 이런 부류들로부터 전체주의 시대라는 전위적 세계관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하인츠 부데(2015), <불안의 사회학: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16쪽, 동녘.
두려움과 불안은 왜곡된 ‘실천’과 ‘행동’을 이끌어낸다. 많은 20대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며 학력과 학벌 중심의 위계적인 사회 시스템에 기꺼이 복종한다. 폭력적인 마초이즘과 내셜널리즘으로 무장한 ‘일베충’ 유형의 청춘 세대들은 기존 질서와 그것을 유지하는 ‘꼰대’들의 윤리와 도덕을 조롱한다. 그들의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를 ‘일베 공화국’의 시대로 이끌지 모른다.
자유로운 시민들은 두려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이 주체적 결정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나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편한 것을 꺼리고, 현실을 부인하며, 가능성을 놓쳐버린다. 불안은 우리를 미혹하는 사람, 지도자와 협잡꾼에게 종속시킨다. 또 불안은 다수의 폭정으로 이끄는데, 모두가 타인을 따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의견을 말하지 않기에 불안은 침묵하는 대중들을 가지고 놀 수 있게 하며, 만일 그것이 과열되면 사회 전체에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루스벨트의 말(“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국가의 정치가 떠맡아야 할 최우선 과제는 바로 시민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덜어주는 일이다. - 위의 책,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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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국가’와 ‘시민들’ 대신 ‘교사’와 ‘아이들’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삶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교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고도 경쟁 사회에서 성과주의에 포획된 채 살아가는 아이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방치하는 교사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 현실은 다르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불안과 두려움에 속수무책이다. 교사들 자신의 삶이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른바 ‘교사의 정치’를 그려 본다.
경제학자 가이 키르쉬와 클라우스 마크샤이트는 환영받는 정치 지도자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고 한다. 하인츠 부데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선동가 유형. 그의 언설은 불안을 사회를 나누고 구분하는 정치의 토대로 삼는다. 그는 정치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불안을 내세운다. 시민들의 불안을 부추긴다. 모든 불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속죄양을 던져준다.
관료 유형. 시민들이 걱정하고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한 사회 현실만 보여준다. 불안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경험과 공포를 배제함으로써 시민의 불안을 잠재워버린다. 결과적으로 그는 시민들을 둔감하게 만든다.
정치가 유형. 불안이 현실의 어느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지 짚어준다. 그럼에도 세상 모든 것을 비난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불안을 다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정치가 유형은, 다수 시민들로부터 꾸준한 지지를 받는 관료 유형과 달리 광적인 반대자와 광적인 추종자를 동시에 갖는다.
나는 ‘교사의 정치’를 실천하고자 하는 교사가 정치가 유형을 적극적으로 참조했으면 좋겠다. 학교와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 혹은 조그만 사회다. 교사와 아이들,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정치적 관계와 정치적 활동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그곳은 무균질의 세계가 아니다. 평화와 협력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교사의 바람은 어찌보면 무망하다.
부데는 정치의 속성을 ‘에너지’와 ‘격투’에서 찾았다. 열정이 없고, 감정의 에너지가 없으며, 충돌과 반발심이 역동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불안과 갈망이 없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고 보았다.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다. 거꾸로 정치의 장에 갈등과 대립이 나타난다. 단언컨대 아이들과 교사가 살아가는 학교와 교실이 그렇다.
정치가는 저항과 패배를 통해 형성되는 우리 내면의 주권을 분명히 알게 해 준다. 이로부터 종말의 분위기, 불가피한 비방 및 폐쇄적인 자세와 반대되는 태도가 나온다. 르상티망(ressentiment, 분노)에 사로잡힌 격정과 침묵에 대한 유혹이 아닌 열린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얻기 위해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함께 새로운 틀을 만듦으로써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위의 책,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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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과거와 미래, 친구와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하다. 어떤 것에든 오래 집중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에게 잔인하다. 친구의 불행에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약한 자를 비웃는다. 아이들은 참된 우정을 나누지 못한다. 놀랍도록 물질적이다. 자기 자신을 아주 싫어한다.
존 테일러 개토가 <학교의 배신>에서 묘사한 미국 아이들의 모습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사들이 학교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가깝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개토는 교사들이 다른 이가 만든 청사진대로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스스로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개토가 비유한 ‘건축가’를 ‘정치가’로 바꿔 읽고 싶다. 이와 동시에 ‘정치가’ 앞에 학교교육의 대원칙이자 방향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수식어로 넣고 싶다. 학교와 교실의 변화가 시작되는 출발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민주사회의 학교들이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지지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하지 않고 그를 위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그 학교들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이거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기껏해야 민주적 삶의 방식, 구체적으로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자신들이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분명히 민주주의에 적이 될 사람들, 즉 쉽게 선동꾼의 먹이가 될 사람들, 그리고 민주적 삶의 방식에 적대적인 지도자를 옹위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학교는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악을 끼친다. 이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제임스 머셀[마이클애플(2015), <민주학교>, 살림터, 56쪽에서 재인용]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 주인공은 ‘실천교육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석학 마이클 애플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석좌교수다. 2015년 10월 26일 <경향신문> 기사(‘실천교육학’ 석학 마이클 애플 교수 “균형 잡힌 역사는 공허한 구호 국정화는 군부독재 은폐 의도”)에서 빌려왔다. 인터넷 주소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