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교육정책,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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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가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전까지 ‘신자유주의 만능론’에 빠져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는 당시 국가 정책과 제도를 입안하고 추진하는 세력과 그것을 비판하는 세력 공히 마찬가지였다. 전자에게 신자유주의는 확고부동한 이념이었다. 후자에게 비판 논리의 핵심에는 예외 없이 신자유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중심 모토 중 하나는 ‘시장만능론’이었다. 성과 경쟁, 규제 철폐, 소비자주권, 자율성, 다양성 등 신자유주의의 가치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교원평가제와 성과급제가 신자유주의 이념을 확산시키는 ‘보도’가 되었다. ‘비효율’의 대명사가 된 공교육이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여 경쟁과 비용-편익의 효율성을 제고시켜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학교를 민영화시켜야 한다. 모두 재정지출을 줄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교육공급자’ 간의 경쟁을 유발시키면, ‘교육서비스’(상품)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마침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 재편 전략에서 강조되던 ‘국가경쟁력 강화(←교육경쟁력 강화)’ 테제에도 부합되는 것이니 두 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교육소비자’의 권익도 되찾아 주겠다고 말하는 데야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관료주의의 폐해로 공교육에 실망한 학부모들은 이들의 ‘약속’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 김용일(2010), <신자유주의 교육개혁과 교육불평등>, ≪진보평론≫(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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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교육 체제 아래서 교사들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힘은 격돌하는 또 다른 교육주체들에 의해 시나브로 약화하였다. 김용일은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학교운영위원회(school governing body, 아래 ‘학운위’)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학운위는 교육소비자(학부모와 기업 인사 등)를 다수파로 하는 조직이다. 신자유주의의 초창기 ‘전사’였던 영국의 대처 정권이 개혁에 저항하는 지방교육청(LEAs)과 교사를 제압하기 위해 이용한 기구가 바로 학운위였다고 한다.
여기에 의결권을 부여하고 다수파인 ‘교육소비자’와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개혁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이다. 우리도 이 모델을 ‘직수입’해왔다. 그러나 ‘개혁주체’가 그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어정쩡한 형태(‘순수한 심의기구’)로 변질되고 말았다. - 김용일, 위의 글
김용일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의 주된 전략 중 하나인 공교육 시장화는 공교육 체제에 ‘시장 조건(market condition)’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시장 조건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학교를 평가해 ‘교육소비자’에게 그 정보를 제공한다. ‘선택권’을 가진 학부모와 학생이 ‘우수한’ 학교를 선택한다. 학교와 교사들 간에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경쟁이 촉발된다. 그 결과 교육의 질이 높아지고, 교육소비자들은 양질의 교육을 제공받는다.
이명박 정권의 이주호 교육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 참여정부 시기에 도입되어 점점 강화되어 온 교원평가 및 성과급제 등이 교육 시장화를 위한 구체적인 수단들이었다. 문제가 없을까. 김용일이 인용한,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을 들어보자.
동기부여는 복잡한 쟁점이다. 각 집단마다 그들이 처해 있는 경제상황에 따라 금전적 동기부여에 대한 반응이 다르고, 그 속의 개인들 역시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중략) 확실히 사회적으로 가장 유용한 일들 중 일부는 금전적 동기가 매우 낮은 사람들에 의해 이룩되고 있다. 교사, 사회복지사, 간호사, 음악가, 배우 그리고 작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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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대상화하는 모든 교육 정책은 필연적으로 교사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자발성을 약화시킨다. 하워드 진을 따라, 낮은 금전적 동기부여 의식을 갖는 교사 집단에게 교원평가제나 성과급을 통한 ‘당근’과 ‘채찍’은 수많은 반발과 냉소를 불러왔다. 그들의 머리속에 전문가 의식이 들어가 자리를 잡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신자유주의적인 교육 정책은 교사들의 전문성을 믿지 않는 듯하다. 영국 서리대학교 마크 올슨 등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이 전문성의 실제를 체계적으로 느슨하게 하고 재구성하는 새로운 형식의 권력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것은 21세기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일이 조직되고 경영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전문직’은 ‘위임(즉 위임된 권위)’에 근거한 권력의 형식을 표상하고 신뢰의 관계로 지지되는 ‘자율’의 원칙이라는 특징을 나타내는 제도적 조직 양식을 구성했다. 이런 관계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특징이다. (자유주의적 통치성과는 반대로) 신자유주의 통치성하에서 주인-대리인, 선형적 명령의 연쇄는 위임된 권력을 권위주의적인 위계적 관계 형식으로 대체하며, 결과적으로 자율 공간은 침식되고 이런 공간의 생성은 방해받는다. - 마크 올슨 외(2015),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계보와 그 너머: 세계화・시민성・민주주의>, 학이시습, 290쪽.
마크 올슨 등은 이런 변화가 교사들과 학자들에게 ‘탈전문화’라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교사의 노동량과 교육과정 운영을 세세하게 규정하고 관리하는 일과 결부된다. 위계적으로 부과된 교사 과업의 명세화(specification)는 교육과 연구 그리고 전문적 실제와 관련된 일에 관한 전통적인 전문적 자율성 개념을 침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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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이다. 이제 표면적인 교육 담론에서 신자유주의 만능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자유주의는 폐기되었는가. 교사 통제의 핵심 기제인 교원평가제와 성과급제가 점점 강화되었다. 갈수록 더 많은 학교와 교사가 교육과정 재구성과 새로운 교육활동 운영 등을 강조하면서 ‘자율’과 ‘다양성’에 눈길을 주고 있지만, 학교의 자율성과 교사 교육활동의 다양성이 제대로 발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힘들다.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하면 할수록 교사는 탈전문가의 길로 빠져든다. 신자유주의적인 이념과 가치가 온전히 살아 있는 교육정책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교사의 ‘운명’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다. 한국어 <위키 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9B%8C%EB%93%9C_%EC%A7%84)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