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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19. 2016

‘낙관’ 애정론자 뇌...이런 문제 생긴다

‘과격한’ 긍정주의와 자기계발론의 해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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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착시(Thatcher illusion)’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 사진을 바탕으로 처음 고안된 착시 현상이다.[아래 ‘착시’에 관련된 내용은 탈리 샤롯(2013), <설계된 망각>, 리더스북 참조)  어떤 사람의 입과 눈을 그대로 놔 두고 나머지 얼굴 전체를 뒤집었을 때 일어난다. 영국 심리학자 피터 톰슨이 처음 발견(고안?)했다고 한다.



뒤집힌 얼굴은 비교적 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표정이나 인상이 괜찮은 듯하다. 문제는 ‘대처화’(입과 눈은 돌리지 않고 얼굴만 뒤집은 것. 위 오른쪽 그림이다. 왼쪽 그림은 정상적인 사진을 그대로 뒤집은 것이다. 둘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상태의 뒤집혀진 얼굴 전체를 그대로 돌려 똑바로 세웠을 때 일어난다. 대처화 상태의 그럭저럭 온화하거나 괜찮은 인상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어떤 괴기스러운 노파가 당신을 떨게 할 것이다.(아래 왼쪽 그림이 위 오른쪽 그림의 대처화 상태에 대응한다.)



왜 우리는 맨 처음의 뒤집힌 얼굴에서 공포스러운 대처의 모습을 보지 못할까. 뇌는 똑바로 선 얼굴과 표정을 탐지하는 데 익숙하다. 눈, 코, 입이라는 얼굴의 각 부위들을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뇌는 각 부품을 따로따로 확인하는 대신, 얼굴과 그것의 표정을 하나의 전체로 처리한다.


뒤집힌 얼굴의 경우에서는 다른 처리 방식이 작동한다고 한다. 실제로든 사진으로든 우리가 뒤집힌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뇌가 그것을 똑바로 선 얼굴에서처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법을 학습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뇌는 위아래가 뒤집어진 얼굴이 제시되면 그 특징들을 통합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따로따로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신경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 탈리 샤롯은 대처 착시를 포함한 많은 착시가 뇌가 어떻게 기능하며, 그러한 착시가 발달하도록 이끈 진화적 제약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 준다고 보았다. 우리 뇌가 우리 주위의 것, 혹은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도 반드시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샤롯은 이런 착각이 우리 신경계의 진화가 낳은 실패작이기보다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들이 때로 재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뇌의 ‘낙관 편향’을 통해 좀 더 알아보자.


인간의 뇌는 편향적으로 낙관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일종의 인지적 착각이다. 인지적 착각은 우리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편하게 지켜주는 임무를 맡는다. 이런 낙관 편향 덕분에 인간은 실재하는 것을 변화시키고, 또 낙관하는 만큼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쯤에서 미국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긍정의 배신>(2013, 부키)에서 통렬한 목소리로 논박한 긍정주의의 폐해를 떠올리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낙관적 믿음이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과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개조한다고? 그렇다면 우리 모두 낙관주의나 긍정주의로 무장해야 하나? 근거 없는 낙관주의나 긍정주의가 현실을 보는 눈을 심하게 뒤틀리게 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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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부터 아이들에게 책 소개를 되도록 많이 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아이들의 여러 가지 관심사와 눈높이에 맞춰 알려주는 편이다. 그래서 ‘청소년’으로 범주화한 책은 일부러 피한다. ‘권장도서’ 식의 목록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지레짐작과 다르게 아이들은 의외로 눈높이가 높다.


책 소개를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한 건 자기계발서 유의 범람 때문이었다. 해마다 하는 독서 수행 평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책 부류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리딩으로 리드하라>(이지성), <시크릿>(론다 번) 들과 같은 책들이었다. 학급문고를 꾸려가자고 책을 가져오라고 하면 거의 빠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거창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별 거 없다. 집에 있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기계발서 유를 본다는 것일 터.


자기계발(서)의 담론과 역사를 파헤친 <거대한 사기극>을 쓴 이원석은 초등학생 때부터 자기계발서를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추천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런 그가 자기계발(서)의 효용성에 의문을 품고 그 이론적 배경과 형식 들을 꼼꼼하게 파헤치게 된 이유가 뭘까.    

 

한동안 자기계발은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작동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략) 하지만 이제 그러한 팽창의 끝에 이르러 그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열풍은 거대한 사기극이었습니다. 국가와 학교와 기업이 담당해야 할 몫을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민영화, 사교육, 비정규직 등), 사회 발전의 동력을 확보한 셈이니까요. - 이원석(2013), <거대한 사기극>, 북바이북, 5~6쪽.    


두루 아는 이가 많을 텐데, 자기계발과 자기계발서의 원류는 미국이다. 자기계발의 시원적 형태는 ‘자조(自助)’로 번역할 만한 ‘self-help’다. 그래서 자기계발서 유는 개인의 동기부여를 중시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이원석에 따르면 동기부여는 미국의 응원 문화, 곧 치어리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선수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관중들로 하여금 힘을 모아 응원하게 하는 치어리더는 전형적인 미국식 산물이다. 치어리더 출신이었던 조지 부시(!)가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원석은 자기계발의 패러다임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윤리적 패러다임과 신비적 패러다임. 전자는 근면과 성실의 힘을 신봉한다. 외부 환경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돌파할 것을 촉구한다. 후자는 상상의 힘을 강조한다.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외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 전자를, <시크릿>이 후자를 대표한다.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이 특별히 눈길을 끄는 지점은, 자기계발을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처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어떤 풍토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이다. 자기계발, 자기관리를 하지 않으면 취업과 승진, 심지어는 결혼조차 잘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자기계발서 유를 손에 쥐지 않는 ‘용기’를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


이즈음에는 인문학이나 고전 독서마저도 자기계발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가령 이지성이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통해 강조하는 것, 신자유주의 전도사 공병호가 <공병호의 고전강독>을 통해 주장하는 것들.


자기계발이 문제임은 분명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계발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면 될까. 그렇다. 어떻게?    


3    


글머리의 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뇌의 진화에 관한 ‘진실’과 우리의 태도는 별개다. 뇌가 생존을 위해 낙관적 착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는 점을 아는 것과, 그 때문에 우리가 낙관주의나 긍정주의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낙관적 착각은 함정을 만들어내고 문제를 가져온다. 샤롯은 과격한 낙관주의자들의 경우 낙관 편향의 단점들이 장점을 압도한다고 본다.


개인의 낙관 편향이 정점에 이를 때가 언제일까. 샤롯에 따르면 정치와 같은 공공의 분야가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 때라고 한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사람들의 뇌가 인지적인 착각을 일으켜 아주 높은 정도로 낙관 편향을 가지게 된다는 것.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을’들은 약하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여리기만 하다. 그런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일조차 드물다. 목소리를 내더라도 돌아오는 건 무시와 냉소가 태반이다. 세상이 바뀔 리 없는데 무모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일이 무용한 것일까.


외침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절망적인 상황을 그대로 뇌두기만 하면 어떠한 변화도 찾아오지 않는다. 뜻을 공유하는 시민들이, 절망적인 현실을 우리 자신이 바꿀 수 있다는 낙관적 편향을 가지고 거리에 나서서 외치는 길만이 이 어두운 세상을 바꾸는 유일무이한 길이 아닐까.


근거 없는 과격한 낙관주의는 우리를 비현실성의 함정 세계로 빠지게 한다. 세상은 분명 바뀔 것이라는 이상적인 낙관주의로 무장한 채, 이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방해물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주변을 둘러보는 일이 중요하다. 자기계발이 필요 없는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을까.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긍정의 배신>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다. <한겨레>(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14136.html)에서 가져왔다. 본문 중의 대처 착시 관련 사진 2건은 한 인터넷 블로그(http://7jaytee7.tistory.com/29)에서 빌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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