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이 미래세대를 파괴한다: 로버트 퍼트넘의 <우리 아이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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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교수의 최신작 <우리 아이들>(2016, 페이퍼로드)을 읽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두 전작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 <나홀로 볼링>에 이은 새 역작으로 평가하고 싶다.
500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내용이 일관되게 향하는 지점은 하나다. 아메리칸 드림은 허구(신화)다. 경제적 불평등이 아이들의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다.
미래세대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약하게 하는 빈부격차 현상이 새삼스러운 문제는 아니다. 퍼트넘 교수의 이 책이 돋보이는 것은 그 현상의 표리를 다양한 통계 자료와 현장 인터뷰와 스케치를 통해 치밀하게 분석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이 또 있다. 퍼트넘 교수는 이 책에서 사회계급의 개념과 지표를 나타내는 항목들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직업, 부, 소득, 교육, 문화, 사회적 지위, 자기 정체성 들이 그것이다. 그중 특별히 중점을 두고 있는 대상은 교육이다. 좋은 직업, 소득 등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의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사회계급의 주요 지표로 교육을 활용하는 정치・사회학적 텍스트를 보기는 쉽지 않다. 퍼트넘은 일반적으로 교육이 아이와 관련된 성과의 강력한 지표로 전제한다. 사회학자 더글러스 매시의 “오늘날의 지식 기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교육”을 통해 사회가 사회계급을 처리하고 다룰 수 있게 됐다는 논리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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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기회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는 섬뜩하다. 퍼트넘의 말을 그대로 가져오면, 기회격차는 경제학자들이 강조하는 ‘기회비용’의 전부를 우리 모두에게 부과한다. 거꾸로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투자는 모든 사람의 성장률을 높여주는 동시에, 경쟁의 장을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우호적인 방식으로 ‘평준화’한다.
‘경쟁의 평준화’로 명명할 만한 이러한 정책 기조는 미국 역사 전체를 관통한 공공교육의 핵심 원리였다고 한다. 또한 많은 경험 연구가 이러한 전제의 가치와 의미의 중요성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는 상당한 비율에 해당하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가치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지극히 많은 비용을 소모시키는 나태한 행동이라고 단언한다.
불평등은 민주주의 체제에도 독이 된다. 교육을 많이 받은 부유한 시민들이 가난하고 교육을 적게 받은 동료 시민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공의 관심사에 참여하고, 더 많은 정치적 지식과 시민적인 능숙함을 지니며, 실제로 모든 형태의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참여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
시민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사회적 제도로부터 절연된 생기 없고 원자화된 대중은 아마도 정상적인 상황 아래서는 정치적 안정에 아주 작은 위협만 부과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떠한 위험이라도 대중의 무감각함에 의해 소리가 잠재워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부가 아주 민주적이지 않을 수 있어도, 적어도 안정은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또는 국제적 압력 아래서는 그러한 ‘생기 없는’ 대중이 갑자기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반민주적 선동 조직에 노출될지도 모른다. - 위의 책, 344쪽.
정치학자 콘하우저는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매카시즘 같은 선동적인 대중 운동에 가장 취약한 시민들이 정확하게 “공동체의 공식적‧비공식적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가장 적은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유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고전적인 저술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대중적인 인간의 주요한 특성은 잔인선과 후진성이 아니라 그가 처한 고립과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의 결핍이다”라고 썼다.
평범하고 성실한 독일 국민들이 침묵과 순응 속에서 나치즘의 광기에 휩쓸린 역사를 서늘하게 떠올린다. 여혐과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일베 청년들, 어버이연합으로 대변되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아스팔트 보수가 범상히 보이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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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은 ‘미국’을 텍스트로 삼았다. 나는 퍼트넘의 분석 틀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더라도 결과가 똑같이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 자본주의 ‘원산지’ 미국보다 더 맹렬하고 야수적인 시스템이 온 나라를 촘촘히 얽어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 학교교육에 대한 퍼트넘의 평가를 들어보면 마치 우리나라 공교육에 대한 평설처럼 다가온다.
유치원에서 12학년(고등학교 3학년)까지, 학교들은 기회격차를 개선하고 있는가 아니면 악화시키고 있는가. (중략) 그 격차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행사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라기보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일어났던 것, 즉 학교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나 그들이 학교로 가지고 오는(또는 가지고 오지 않은) 것-어떤 아이들은 자원을 가지고 오지만, 어떤 아이들은 문젯거리를 가지고 온다-에 의해 만들어진다. 오늘날의 미국 공립학교는 일종의 반향실(反響室; 흡음률이 작은 재료로 실내를 만들어 소리가 잘 울리도록 만든 방)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안에서는 아이들이 학교로 가지고 오는 강점과 약점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이웃들 사이에서 늘어나는 계급 차별과 학교들 사이에서 늘어나는 계급 차별이 의미하는 것은…중산층 아이들은 학교에서 대부분 고무적이며 혜택이 많은 메아리를 듣게 되는 반면…저소득층 아이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낙심하게 만드는 해로운 메어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 로버트 퍼트넘(2016), 위의 책, 262~263쪽.
희망적인 사실은, 그가 여전히 학교가 기회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문제를 논할 때 학교를 비난하는 일반적인 실수를 지적하면서, 학교와 더불어 격차를 좁히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교육 비판론이 교육 담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하는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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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할까. 퍼트넘은 “행동을 위한 편향된 생각”(374쪽)을 언급했다.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헌신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가 인용한 프란치스코의 교황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울어주지 못하고, 그들을 도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책임인 것처럼 말입니다. (중략) 우리가 (젊은이들을) 소외시킬 때 우리는 그들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하나의 가족, 나의 나라, 하나의 문화, 하나의 신앙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우리 인류의 미래입니다. - 위의 책, 346쪽.
개인, 가정 차원에서 약간의 노력을 더 기울일 필요도 있다. 힘들 때가 많겠지만 되도록 저녁을 가족들과 더 자주 가지도록 해 보자. 적어도 일주일에 5번 정도 부모와 저녁식사를 하는 청소년들은 여러 영역에서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들은 흡연, 음주, 마리화나 이용, 심한 싸움, 성관계 등을 할 가능성이 적었고, 학교로부터 정학을 받을 가능성도 적었다고 한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우리 아이들>의 표지다. 포털 <다음> '책'(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6256213)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