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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 Aug 24. 2020

아이의 성적을 위해 내가 한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다. 내가 자라던 시절과 너무 다른 훈육방식 때문에 더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라떼는 말이야~ 어른에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단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잘못을 하거나 문제가 생겨서 선생님 앞에 서면 일장 훈계가 쏟아졌다. 육하원칙에 의한 논리적 설명이든 무한 반복 잔소리든 일단 선생님 말씀이 우다다다 쏟아졌다. 학생은 그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뉘우치고 있다는 아우라를 온몸으로 나타내야 했다.


물론 중간 중간 학생의 의견을 묻기도 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게 지금 말이 되는 거니?"

"잘한거야 잘못한 거야?"


질문인지 결론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이 중간 중간에 추임새처럼 끼워졌다.




어른이 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받은대로는 가르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잘못했을 때에도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자상하고 따뜻한 큰 나무같은 선생님. 그런 선생님을 꿈꿨다.


아이들을 가르친지 어느새 10년. 내가 꿈꾸었던 선생님은 어디 갔을까. 회귀본능처럼 나의 말투와 행동은 예전 선생님들을 꼭 빼닮아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예전의 나와 같은 아이가 서있다. 의기소침하고 고개를 푹 숙인채 눈치를 보는 작은 아이.


물론 의도는 좋았다. 매일 숙제를 검사하고 공부량을 체크하면서 아이들의 성실성을 키울 수 있다. 미루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는 습관이 생기면 성적은 자연히 오를 터였다. 좋은 습관과 좋은 성적만큼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게 뭐가 있을까. 나의 의도와 방향성은 아이의 인생을 꽃길로 바꿔줄 터였다.





문제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큰뜻'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거였다. 앞날이 환해지든 말든 지금 당장 게임을 하고 싶고 자고싶고 놀고싶을 뿐이다. 머리로는 선생님 말을 이해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버티고 앉아있는 소를 끌고 가려면 채찍질이 필요했다. 꿈쩍도 앉는 아이에게 무서운 훈계가 떨어지고 그마저도 안되면 어머님께 상황을 전달해 다중 채널로 아이의 공부상황을 확인했다. 모든건 다 아이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말 성적이 올랐다. 억지로든 뭐든 꾸준히 숙제하는 습관도 생겼다. 단 하나, 반짝거리던 뭔가가 사라졌을 뿐.



아이는 혼나지 않기 위해 숙제했고 검사를 받을 때면 빼먹은게 있을까 긴장했다. 가끔씩 칭찬을 해 줄때면 기뻐하는게 아니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랬다. 반짝거리던 건 아이의 웃음이었다. 한발짝 한발짝 스스로 걸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성적과 빛을 바꿔치기했다.




기말고사를 끝내고 아이의 오른 성적표를 앞에 두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뭣이 더 중한걸까. 눈에 보이는 숫자를 얻기 위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잃어버린건 아닐까. 아이의 인생에 나는 득일까 독일까.


혼란스럽기만한 지금 한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아이의 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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