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지털 노마드 in 스페인
주중에는 수업을 하기 때문에 새로운 도시로의 이동은 주말에만 가능했다. 그 말인즉슨 일단 한 도시에 정착하면 최소한 일주일은 머물러야 다른 도시로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방문할 도시를 선정하는데 다음 질문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 도시에 일주일씩 있을 가치가 있는가?”
그라나다는 이 질문에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도시였다. 5년전 혼자 스페인 여행을 하며 그라나다에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이 도시가 그렇게 큰 매력이 있지는 않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짧게 보자면 1박2일 기껏해야 2,3일이면 충분히 둘러보고도 남을 곳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그저그러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곳이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알함브라 성이었다.
나는 그라나다에 오기 며칠전부터 남편에게 도시 자체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계속 당부했다. 우리의 목표는 알함브라 궁전이니 다른 6일은 휴가인듯 그냥 쉬어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궁전을 방문하는 하루는 모든 에너지를 불살라 성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토요일에 그라나다에 도착했고 하루를 충전한 후 월요일에 궁전을 찾았다. 점심때 쯤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알함브라를 향해 집을 나섰다. 든든히 에너지 보충을 해야한다며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금 점심을 먹었지만 아이스크림 두 스쿱쯤 더 얹는다고 위가 크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기는 스페인, 미식의 나라니까.
이쯤되면 몸도 정신도 무장이 되었고 이제 궁전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높은 언덕위에 지어진 요새답게 성 입구까지는 구불구불 산길로 이어졌다. 알바이신 지구와 알함브라 경계를 따라 다로 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노천카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분 좋은 햇살 아래 맛있는 타파스와 시원한 상그리아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게들은 북적였다. 멋진 장소만큼이나 사람 구경도 재미난 일이라는 걸 이번 여행에서 더 느낄 수 있었다.
이리 저리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성 입구에 도착했다. 이슬람 왕조의 전성기인 13세기에 건설을 시작해 14세기에 완공된 이 성은 무려 천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켜왔다. 한때는 이슬람 왕조의 풍요를 상징했지만 후에 가톨릭 세력에게 점령당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떠돌이 집시들의 거처가 되었고 근대에 들어 우연히 그 존재가 발견되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성 안에는 다양한 궁전과 정원, 탑들이 있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 도무지 하루만에 다 둘러볼 수는 없다.
나스르 궁전, 헤네릴리페 정원, 알카사바 성채가 주요 방문장소이고 나머지 부분들은 각자 체력과 시간에 따라 취사선책 된다. 딱 국민 표준 체력인 우리는 이 세 장소에 주력했다. 형형색색 꽃들이 만발한 헤네릴리페 정원과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던 알카사바 성채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오래, 가장 진하게 그 여운을 남긴 곳은 나스르 궁전이었다.
나스르 궁전은 그야말로 알함브라의 꽃, 이슬람 건축물의 절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100년에 걸쳐 완공된 이 궁전은 왕이 거주하던 방과 집무실, 여러나라의 사절을 맞이하는 행사장, 화려하기 그지 없는 정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벽면과 천장을 수놓은 정교한 조각들은 금방이라도 별처럼 우수수 쏟아질것만 같았다.
이탈리아의 바티칸 성당을 비롯해 유럽의 엄청난 건축물들이 엄청난 스케일에 대놓고 화려한 기술로 보는 이를 압도했다면 이곳은 섬세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한땀 한땀 수놓듯이 궁전을 그려냈다.
빼곡히 채워진 색과 선이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작품이 되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처음으로 알았다. 겸손한 아름다움이 때로는 그 어느 화려한 작품보다 더 강하게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걸. 이슬람인들은 이미 천년 전에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거다.
나스르 궁전의 또 다른 매력은 건물 밖에 있었다. 자연광 위주로만 조명을 이용해 건물 내부는 살짝 어두운 감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벽이며 천장이며 건물을 들여다 보다가 밖으로 나오면 아찔한 5월 햇살이 눈앞에 쏟아졌다. 바닥이며 기둥이며 하얀 대리석들이 햇살을 그대로 반사했고 새하얀 바닥에 피어있는 빨간 꽃들과 꽃들을 감싸고 있는 초록색 정원이 그 어떤 미술 작품보다 더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다.
곳곳에 놓인 연못과 분수에는 반짝반짝 햇살을 머금은 물방울들이 무지개빛 춤을 추고 있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재료들만으로 이루어낸 멋진 장면이었다. 궁 안이나 밖이나 이슬람인들의 겸손한 아름다움은 그 어떤 작품보다 빛나는 기억이 되었다.
월요일 하루를 온전히 알함브라 성에 쏟고 우리는 나머지 6일은 정말 쉬듯이 놀듯이 보냈다. 역시나 그라나다는 알함브라 이외에 특별히 돌아볼 곳이 없었다.
동네 마실을 하고 쇼핑 거리를 몇차례 돌면서 순간 순간 지금 내가 뭘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럴때마다 떠올랐던 알함브라에서의 강렬한 기억은 항상 같은 결론을 안겨 주었다. 꿈같았던 하루.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