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기흥 세무서 근처에 있는 순천회관.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맛집. 특히 보리굴비가 좋다. 이런저런 일로 긴 하루가 지나고 간만에 아내와 같이 가서 보리굴비와 막걸리를 주문했다.
그런데 건너편 구석의 자리가 왁자지껄 시끄럽다. 목소리가 커서 다 들린다. 50대 후반의 남자 셋이 앉아서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다. 이들은 서로 친구 사이인 모양인데 오랜만에 같이 자리를 한 것 같았고 소주병이 5병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은 어느 정도들 되어 있었다.
한 남자는 제주 43 사건 여순반란사건 등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한 모양으로 연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다. 친일파가 나오고 이승만 박정희가 나왔다. 역사의식 사나이.
얘기를 듣고 있는 한 명은 역사가 밥 먹여 주나 하는 역사무의식 사나이. 돈이 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이냐 이 말이지. 그런 두 사람은 어쩌다 친구가 되었을까. 당근 둘은 옥신각신 언쟁이 붙을 수밖에 없다.
이승만의 욕심과 박정희의 독재가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사를 꼬이게 만든 역사의 죄인들이라고 소리를 높인다. 이때 역사무의식 사나이가 맞 받았다. "그래도 이승만이가 공산화 안 되게 했고, 박정희가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었잖아."
이 말은 역사의식 사나이를 격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격분한 역사의식 사나이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그들이 얼마나 부당하고 반민주적이며 배신의 배신을 하였고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를 열심히 나열해가면 열을 올렸다.
상대편의 남자는 듣고는 있으나 동의하는 것은 일도 없는 기색이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를 진실로 정성스럽게 온 힘을 다하여 견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열심히 이 둘 사이를 중재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극단의 둘을 중재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각자의 화를 돋우고 있는 상황.
역사의식 사나이가 "5.18"을 외쳤다. 때마침 우리 자리에 고막 무침을 가져다주던 식당 주인이 "아이고 5.18 나왔다. 5.18 나왔어. 이제 곧 파장 나겠네. 여기 와서 술 마시고 얼마나 싸우는지 몰라요. 벽에 '정치 얘기 금지'라고 써 붙여놓던가 해야지."
아내는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남자들은 만나면 중요한 얘기를 하긴 하는구나" 내가 따라 웃었다.
잠시 후 역사의식 사나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한 다음 나가 버렸다. 역사의식만큼 계산 의식도 있다. 식당 주인이 우리 식탁 옆으로 지나가면서 말했다. "저거 삐져서 가는 거예요. 남자들도 나이 들면 저리 삐지데 ㅎㅎㅎ"
나머지 일행 두 명도 곧 따라 일어나 자리를 뜨면서 앞서가는 역사무의식 남자에게 중재 실패 남자가 말했다. "가서 잡아. 맥주 한잔 입가심하면서 풀어야지" 중재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보며 내 학창 시절에 배운 역사란 것이 무엇이었나 돌아본다. 중요한 현대사가 빠진 고대사를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 참. 그런 교육환경 속에서 우리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고 역사의식을 가지지는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듯하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었겠지만. 무릇,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므로 현재를 차지한 자가 역사를 차지하는 것.
정치 얘기 하지 말자.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정치적인 동물인 우리들이 어찌 정치 얘기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겠나. 문제는 정치 얘기가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우리들은 정치 얘기와 역사 얘기를 혼동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 정치 얘기마저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정치 얘기란 무릇 '경제 민생 복지 민주' 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가치를 어찌하면 고양하고 넓히고 고르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텐데. 지금은 '독식과 불평등, 권력과 돈, 비위와 비리, 니편 내편'에 대한 날썬 공방으로 정치 얘기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라도 역사 바로 알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역사의식 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