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해야 일을 하지.
나는 영어를 아주 어릴 때 배웠다. 아버지께서 미네소타 주에 있는 대학의 교환교수로 인해 가족 모두가 미국에서 살았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미국에서 언니는 초등학교를, 나는 유치원을 다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지금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별로 없었던 영어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생 방학 때는 틈틈이 미국으로 여행을 가 YMCA 등의 캠프를 다니곤 했다. 이처럼 우리 부모님께서는 영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는 두 번의 미국 인턴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유학생도 그렇겠지만 인턴 역시 영어를 안 쓰려면 얼마든지 안 쓸 수 있다. 내가 있는 연구소 특성상 나는 약간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거 이기 때문에 굳이 내 작업 내용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고, 의견을 나눌 필요도 없다. 직원들이 가끔 쉬는 시간에 스타벅스 가자고 하는 것도 괜찮다고 정중하게 거절하면 넘어간다. 주 2일 수업들을 때 역시 영어를 안 하고 어물쩡 지나가면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이 말하기 때문에 어쨌든 수업은 진행된다. 안하려면 정말 안 할 수 있다.
제일 웃겼던 건 시애틀에서 인턴을 하였을 때는 정말 진짜! 아예! 영어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오래되지 않은 프로그램이라 안전하게 대부분의 학생들을 미국에 있는 한인 회사를 보내주었고, (현재는 모두 미국인만 있는 로컬 기업들에 보내준다고 들었다 부럽다!!) 직원들 역시 대부분이 모두 한국인이라 영어를 쓰지 않았다.
미국에서 오래 거주하셨던 분들이기 때문에 미국 문화+한국문화가 짬뽕인 전형적인 한인 회사였다. 인턴 경험도 좋지만 미국에서 대학원, 어쩌면 취업까지 생각하고 있는 나는 학생 때 그 분위기를 미리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두 달 동안 한국어만 알차게 쓴 듯하다. 지금은 하루에 네다섯 통씩 쓰는 그 흔한 이메일 한번 영문으로 써본 적 없다. 영어를 쓸 때는 오직 주말에 다운타운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뿐이었다.
같이 온 친구들 중에 이런 점을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고, 아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한국어로만 업무를 하였을 거면 굳이 뭐하러 경력으로 인정하기도 어려운 해외로 가서 아까운 시간을 보냈는지에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기대했던 게 아니었다.
처음 미주리에 도착했을 땐, 미국인 친구들과도 이야기하는 게 어색했고 연구소 사람들이랑은 더더욱 어색했다. 영어로 나를 소개하는 법도 몰랐고 내 의견을 말하기까지 생각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부끄러워 말하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정말 기본 인사인 "How're you?"도 익숙하지 않아서 그저 미소 지어주거나 "Good"이라고 작게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인사해준 사람도 참 무안했을 듯한.)
지금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좋으니 부딪쳐보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차피 한정돼있고 6월이면 한국으로 무조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비행기표 취소가 안된다.)
출퇴근할 때 가벼운 인사와 small talk도 힘들어서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는데 요즘은 인사와 함께 날씨나 점심에 뭐 먹을지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하거나, 스타벅스 타임을 가질 때 먼저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어보고 있다. 같이 카페를 가면서 "나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professional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어. 혹시 괜찮다면 도와주거나 advice를 줄 수 있겠니?" 등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내 이야기를 먼저 한다거나 해서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사람은 없다. 여기 사람들이 정말 착한 것도 있지만 모자란 내 영어가 끝나기까지 차분히 기다려줬던 게 말할 수 있는 많은 용기를 줬다.
얼마 전에는 연구소 사람 중에 통계학과 데이터 분석을 전공하는 중국인 언니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카페를 갔는데, 우리의 전공과 오게 된 계기 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슈퍼바이저가 굉장히 흐뭇해했다.) 현재 내 프로젝트는 사용자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발전 가능성을 찾는 거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만약에 통계나 데이터에 관심이 있으면 자기한테 언제든지 물어봐도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 석사에도 관심이 많으셨는데, "영어에 아직 자신감이 없고 배워가는 중이다"라 하니 "너의 영어는 괜찮아! 정말 충분히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어!"라고 격러를 해주셨다.
저번 주 토요일은 Mizzou Day라고 학생들, 가족, 외부 사람들 등이 학교에 방문해서 전공체험처럼 특강 같은 것도 골라서 들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이벤트를 즐길 수 있는 날이었다. 나는 이때 관심 있었던 'How to Test Usability and User Experience of Digital Systems and Apps'를 신청했다
내가 신청한 강의는 이 IE연구소 (Information Experience)에서 담당하는 강의였고, 소규모 강의였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교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교수님을 꼭 뵈어야만 했는데, 교수님께 말씀드려 허락을 받아야 디바이스를 대여할 수 있었다. 가격이 차 한 대 값이라 영혼을 끌어모은 정성스러운 메일을 보냈지만 다른 연구소 소속에, 만나본 적도 없는 외국인 사람이 빌려달라 하니 당연히 거절당했다.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교수님의 성함, 주요 연구, 사진 등을 기억하고 강의를 들으러 갔다. 시간 공지가 잘 못 되어있어서 아쉽게도 강의는 못 들었지만 교수님은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내 소개를 하고 '메일을 보냈던 인턴이다. 현재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고 개인 프로젝트를 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다'라고 열심히 손짓과 (다행히 그날따라 잘 되는) 영어로 말씀드렸다. 정말 이때만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존 영어를 했다. 다행히 내 진심이 통했는지 차 한 대 값 짜리 기기를 빌릴 수 있었다. 덕분에 진행하지 못할 뻔한 프로젝트를 별문제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브런치 글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작가님은 수업에 대한 과제 내용을 하나도 못 알아 들었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부끄러워 교수님께 더 여쭤보지 않고 그냥 넘어갔던 적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미국인 친구한테 "과제가 그래서 뭘 하라는 거야?"라고 물어보니 그 친구 역시 "나도 모르겠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고 내가 했던 고민들 역시 모두가 했었구나 생각했다. 내가 영어에 대해서 했던 고민들은 나보다 똑똑하고 토플 점수가 높았던 유학생들도 했던 고민이었다. 영어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I'm not good at english"와 "I'm learning my english"는 큰 차이가 있다. 처음 이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전자같이 생각을 하면 '나는 계속 영어를 못하니까'라고 계속 생각하게 된다라 했다. 후자는 '나는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야! 지금은 잘 모르지만 앞으로 더 배워나갈 거야!'라는 차이가 있다는 말이 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가끔 말을 더듬는다. 정말 쉬운 단어인데 기억이 갑자기 나지 않아서 저 멀리 어딘가 숨어있는 단어를 끌어와야 한다. 틀린 어휘를 사용하여 문장의 뜻을 약간 바꿔버리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떡하랴. 내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리기에 급급하다면 내 남은 시간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