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건망증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by 델리만쥬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 나를 잃어버린 지 오래야

하도 오래되어서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해

그 어디에도, 나는 없어

학교에도 학원에도 버스에도 나는 없어

혹시나 해서 찾아가 본 분실물 보관소에도 나는 없었어

그렇다고 날 완전히 잃어버린 건 아니야

출석을 부를 때 분명히 '예', 하고 대답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거든

하지만 그뿐

그 어디에도 나는 없어

부탁이야, 어디서든 나를 보면 곧장 연락 좀 해줘

잘 타일러서 보내줘

바다도 보여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맛있는 것도 실컷 좀 사 먹여서 보내줘


암튼, 하고 싶다는 거 다 해 줘서라도 꼭 좀 내 몸한테 돌려 보내줘

우연히라도 나를 보거든 꼭 좀 연락해줘, 후사할게


- '오래된 건망증', 박성우


유튜브를 잘 안 본다. 침착맨, 덱스, 히밥 등 다양한 분야의 유명 크리에이터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내가 보는 유튜브 채널들은 정해져 있다.


그러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까지 넘어온 덱스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공부가 하기 싫었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제는 거의 전생 아닌가 싶은 옛날이지만, 입시 때의 날 떠올려 봤다


나는 어땠지? 무작정 학벌이 더 좋은 곳이어야 한다고만 주장했었던 나였다.

이미 많이도 흐려진 기억이지만, 다행히 그 기억을 잃어버리진 않았다. 오롯이, 나의 주머니 안에 있었다

그러나, 뭔가 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던 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실력이 되건 말건, 합격권이건 아니건 영어교사가 되고 싶다고 외치던 나의 모습이 초창기로 남아 있었다

그 전의 것들은, 자연소실이라고 해야겠지?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었다

후사한다 한들 그때의 나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그리고 이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대학 와서의 나를 훑어보았다

덱스처럼 소신 있게 말한 적이 있었나? 아니, 그저 전공 상 많이 가는 진로를 선택하면서 이게 하고 싶다고 주장하던 나만이 있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경험해보면서, 실제로 흥미로워 했으므로.

그러나 동시에, 이를 위해 하고 싶었던 것들을 아예 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원래 하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 다 생각나지 않는 것도, 정말 하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는 것도 사실이다


나의 목소리는 어디서 들을 수 있는 걸까. 존재 이외에, 알 수 있는 내용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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