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물은 조용히 내가 걸었던 길을 저장해 둔다
1월 4일 일요일.
새해 첫 주말이지만,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가 있어 R 프로그램을 켜서 이런저런 코딩을 하다가, 우연히 우측 상단에 저장된 변수 목록을 보게 됐다.
특별한 이름도 아니고, 과제할 때 무심하게 붙였을 변수들의 이름.
그런데 그중 몇 개가 눈에 익었다. 2024년, 학부 4학년 2학기(TMI: 필자는 1학기만 휴학하여 엇학기였다).
나는 그때 21학점, 과제, 멘토링, 대학원 입시에 대한 고민 등으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던,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 과제를 하면서 만들어진 변수들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효기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옮겨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삭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내 눈에 안 띄었다 뿐이겠지.
그런데 그 변수 리스트를 보는 순간 묘하게 주변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앉아 있는 책상도, 화면도 그대로인데 머릿속에서는 그때의 내가 잠깐 나타났다.
늦은 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얼굴, 학업적인 욕심과 당시에는 중요하다고 믿었던 고민들.
생각해보면 컴퓨터에는 이런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몇 년 전 저장한 파일 이름, 다시 열어보지 않는 폴더, 더 이상 쓰지 않는 메모와 초안들.
내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삭제하지 않는 이상 남아있는 것들이니까.
우리는 꽤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지만 저장된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다시 마주칠 때가 있을 뿐이다.
오늘 본 변수들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진 않았다. 다만, 그 시절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도 나름의 추억일 것이다.
사진이나 글이 아니라, 값과 이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기억.
공대에는 낭만이 없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저런 형태가 무슨 낭만이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낭만이 다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을 뿐이라 느껴진다.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우연히 다시 열어보는 그런 낭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