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조각들 - 서울과 파리에서 수집한

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 사회 생존기 (1 - 2009~2011)

by 레브뉘

1) 낭만이 가득했던 학부시절


상권이 죽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젊음의 메카'라 불렸던 신촌에서 대학을 다녔던 나는, '타임슬립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갈 거야?'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2009년이라 답한다.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수능을 (꽤나 잘 본) 직후, 낭만이 가득했던 학부 시절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계획을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어울리겠다. 어느 대학을 갈까 고민했던 시점엔, 집에서 가까운 대학으로 성적에 맞춰서. 어느 과를 갈까 고민했던 시점엔, 성적이 잘 나올 것 같은 불문과로. 그러나 이건 나중에 큰 오산이었단 것이 밝혀지는데... 아무리 고등학생 때 불어를 잘했더라도, 어항 속 물고기가 바다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던 것이었으니.


우린 외국어문학부로 들어와 '비상9'라는 이름 아래 모였다. 영문과, 중문과, 노문과, 독문과, 불문과. 각 과의 낭만주의자들. 마치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위솔과 외당 사이에 숨어있는 과방은 우리의 완벽한 아지트였다. 마침 반 밴드 이름도 '레떼'. 현실을 잊고 낭만을 쫓던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망각의 강'이라는 이름 아닌가.


이런 게 낭만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

낭만주의자의 서글픈 학점의 역사는 유래가 깊다.


하필 사학입문 강의실은 과방 바로 앞이었다. 출석을 부르고 나면 슬그머니 화장실 가는 척, 뒷문으로 나와 과방 소파에 누웠다. 숙취를 해소하는 데는 과방 소파만 한 게 없었으니까. 불문과 교수님들의 기억력도 문제였다.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출석체크를 하지 않길래. '아, 이 수업은 출석이 널널한가 보다.' C+을 받고 나서야 알았다. 교수님이 출석체크를 하지 않았던 건 소수였던 우리 불문과 학생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어 번 수업시간에 얼굴을 비춘 내게 C+이라도 주신 걸 감사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부모님이 알았으면 기함을 토했을 일이지만, 나는 이미 어른인걸 어쩌나. 그래,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게 어른이다. 훗날 군대를 다녀온 남자 동기들과 함께 학교를 6년 다니며, 수많은 재수강으로 간신히 3.0을 맞춰 졸업할 수 있게 된 것. 이것 역시 나의 낭만의 대가에 대한 책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2) 파리행 특급열차


계획을 하지 않았던 인생이지만, 대학생활 중 꼭 해보고 싶었던 건 있다. 바로, 교환학생. 평소 윗사람들 말을 잘 듣지 않지만, 존경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면 굉장한 followship을 보이는 나다. 인생을 통틀어 몇몇 윗사람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한 명이 우리 고등학교 먼 선배님이자 수능 외국어 영역을 가르쳐주던 학원 선생님이다. 안타깝게도 그 선배(생)님이 알려주신 수업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교환학생이란 네 글자는 뇌리에 뚜렷이 박혀 대학 생활의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았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건 하늘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확히는 윗사람을 가려 섬기는(?) 능력 덕분이랄까. 불문과 정식 교수님은 6명뿐이었는데, 3명은 나를 이뻐하셨고 3명은 싫어하셨다. 빼곡히 서술형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시험에서도 100점 만점을 주실 정도로 이뻐하셨고, C+을 재수강하면 D-를 주실 정도로 싫어하셨다. 교환학생 선발을 하던 당시 학과장님은 다행히도 전자였다.


게다가 타이밍도 좋았다. 그 해 Sciences-Po에서 우리 학교로 3명이나 학생을 보냈고, DELF 보유자에게 지원 특전이 있어서, 영어 성적만으로 지원했던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거다. 면접에서 학과장님은 "이 정도 실력이면 가서 꽤나 고생할 건데." 하시면서도, 감사하게도 큰 선물을 내려주셨다.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시작하던 3학년이 되자마자, 나는 낭만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자본주의 사회에 던져지기 전 마지막 도피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망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학업은 엉망이었다. 학과장님 예언(?)대로 꽤나 고생했다. 미래의 정치가들을 배출하는 그랑제꼴 Sciences-Po의 수업은, 프랑스어를 고작 5년도 안 배운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요즘 같으면 AI의 도움이라도 받았을 텐데. 한국에서 최대 50학점을 들을 수 있었던 1년, 나는 겨우 13학점만 이수했다.


그 대신 난 열심히 파리 곳곳에 흩어진 낭만의 조각을 수집했다. 루브르 도보 5분 거리에 살았던 나는, 매주 루브르에 들러 전시장 1개씩 아껴 관람을 하곤 했다. 파리는 학생들에게 매우 관대한 도시다! 온 박물관과 미술관이 학생증만 있으면 무료입장 가능하기에, 관광객들이 붐비지 않는 폐장 약 1시간 전에 들러 구석구석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루브르밤.jpg


원래의 나는 대문자 EEEEE지만, 파리에서의 나는 소문자 e 어쩌면 소문자 i 였을지도 모른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답답했기 때문일까. 정말 필수적인 순간이 아니고서야, 프랑스어를 쓰는 빈도를 최대한 낮추려고 혼자 전시장을 찾아다니곤 했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 멀리까지 가서 오히려 프랑스 친구를 많이 만들었어야지!


전 세계가 BTS와 케데헌에 열광하는 요즘만큼은 아니지만, 그 당시 파리도 K-culture에 대한 관심이 막 피어오르고 있었다. 생 미셸 거리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한국인들은 전 세계 어딜 가나 서로를 알아보니까. "네." 별생각 없이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웬 걸. 흑인 소녀 둘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를 아냐며. 소르본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단다. 내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에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쏘리쏘리 플래시몹이 열렸는데, 어쩌면 이들이 주최자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상이 점점 지루해져 가고, 룸메가 둘이나 있었어도 외로움은 극에 달하던, 10달째 파리. 그때 <뿌리 깊은 나무>를 봤다. 지금이야 넷플릭스로 언제 어디서든 K-드라마를 볼 수 있지만, 당시엔 WAVVE의 전신인 POOQ이 이제 막 서비스를 시작하던 때였고 해외서는 접속조차 안 됐다. 콘텐츠 산업 종사자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어둠의 루트로 힘들게 구한 몇 개의 K-드라마를 대사를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봤다.


조상들이 이토록 힘들게 지켜낸 아름다운 한글이 있는데, 나는 뭣하러 먼 이국 땅에 나와서 생고생인가. 펑펑 울고는, 다짐했다. 한국의 문화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아들 이름을 '도'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래도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먹고살지 여전히 몰랐다. 낭만주의자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막연한 꿈만 안고, 서울로 돌아갈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