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 사회 생존기 (2 - 2012~2014)
1) 서울의 겨울
여유가 흘러넘쳤던 파리 생활을 뒤로한 채, 돌아온 서울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08학번 선배들은 취업을 턱턱 잘 해냈다.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그랬다. 그 모습을 보고는 우리에게도 세상이 팔을 벌려줄 거라고, 때가 되면 취업을 잘하겠거니 희망회로를 돌렸다. 그러나 웬걸, 우리가 4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취준을 시작하던 2012년부터 취업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10학번 후배들은 우리를 보고는, 일찌감치 스펙 관리를 시작해 취업의 문을 넘었다. 3살 터울 동생도 불문과 누나의 고생을 지켜보더니, '경영학과+컴퓨터공학' 복수전공을 선택해 자본주의 사회에 발 빠르게 발을 들였다. 참 나,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보람 있다고 해야 하나.
더 이상 낭만만으로 살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우리 부모님에게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기는 어려웠다. 서글픈 부동산의 역사는 이루 말할 수도 없고, 나보다 주식을 늦게 시작한 분들이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부모님은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다. 군인이었던 아빠와 간호사였던 엄마가 아는 '안정적인 직업'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알고 있었다. 공무원이 됐다면 3개월도 못 버텼을 거라는 걸.
사실 대학 입학 후로는 더 이상 용돈을 받지 않았다. 친구들과 낭만을 추구하기에 충분한 돈을 과외와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였다. 그런데 이걸 자본부의 사회에 적응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 집에서 편히 먹고 자면서, 시급 3만 원짜리 과외 몇 개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취업 시장에 내던져져 생채기가 하나 둘 쌓여가면서 생각했다. '그냥 과외를 계속하면서 살까?' 훗날 첫 현장에서 첫 월급을 타고 통장에 새겨진 숫자를 보고 나서야 후회했다. 과외나 계속할 걸 그랬어.
서울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면서도, 취업을 한다는 뜻이 정확히 뭔지는 몰랐다. 그래도 다행히,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채 그냥 기계적으로 면접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 중 하나는 아니었다. 목표는 뚜렷했다. 한국의 문화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꿈. 파리에서 펑펑 울며 다짐했던 것. 가장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곳은 콘텐츠 산업이었고, 그렇다면 '언론고시'를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과 선배들 중 정보를 얻을 사람도 없는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면, 반드시 중앙동아리를 하리라.
요즘처럼 수시 채용을 하지 않고, 1년에 1~2번 정기 공채로만 사람을 뽑던 시기였다. 2012년 공채에 지원할 수가 없는 상황. 한참 모자란 졸업 이수 학점도 채워야 했고, (낭만의 대가였던) 모자란 학점도 올려야 했다.
그래서 대학 연합 독서토론 동아리에 들어갔다. 언시 준비를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여전히 낭만을 쫓았다. 동아리 활동만큼은 빡세게 했다. 매주 1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발제를 하고, 토론을 했다. 다만 읽은 책이 취업준비 서적이 아니라 순수 문학과 비문학이었을 뿐. 그래도 평생 소설만 읽으며 독서 편식을 하던 내가 역사, 정치, 자연과학 등의 다양한 분야로 독서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술과 여흥을 즐겼고, 언시 준비를 핑계 삼아 각종 문화생활을 향유했다.
2) 현장으로 가는 길
콘텐츠 업계로 뛰어든 건 어쩌면 자의보다는 타의가 컸다.
졸업 이수 학점을 다 채운 2013년, 취준 첫 해였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방송국 5곳에 지원했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서류도 필기도 순조롭게 통과했다. 자신감이 만땅이었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왜 현장 경험이 없어요? 많이 힘들 텐데. 버틸 수 있을까?"
PD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이제와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저 질문이 현장 경험을 하고 오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내가 지금껏 해 온 경험을 토대로, 면접관들에게 내가 PD가 되어서 잘 적응할 능력을 어필하면 된다고. 물론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PD들에겐 텔링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작가들이 글로 먹고 사는 것처럼, PD들은 말로 먹고 산다고. 돌이켜보면 면접관은 정말로 걱정되어 물은 것이리라. 신입이 금방 나가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나만 해도 벌써 몇 명의 후배들을 새로 받았던가. 일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런데, 10년 전의 영화과나 신방과가 아니라는 자격지심(?)이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현장으로 뛰쳐나갔다. 필름메이커스에서 보이는 수많은 채용공고에 지원을 했고, 그중 한 곳에서 당장 다음 주부터 나오라는 답을 들었다. 그곳이 저예산 상업영화의 탈을 쓴, 포르노 촬영장일 줄은 몰랐지.
초심자의 행운은 2013년 한 해뿐이었다. 재수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간신히 3.0을 맞춰 졸업했지만, 면접의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2014년, 스펙은 그대로인데 한 해가 지나자 모든 서류에서 떨어졌다. 나이가 문제일까. 1년 차이가 이렇게 크다니. 스물넷이나 스물다섯이나 지금 생각하면 애긴데, 그때는 문제의 원인을 밖으로 돌리고 싶었던 것 같다.
2015년, 또 한 해가 지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취업시장에서 낭만이 얼마나 외면받는지 현실을 체감하며, 일반 기업도 쓰기 시작했다. 방송이랑 유사한 게임, 먹을 걸 좋아하니까 식품, 프랑스어가 필요한 모든 기업들까지. 그래도 50곳도 안 썼던 것 보면, 마음 한 켠 낭만을 쫓고 싶은 갈망이 사라지지 않았던 거겠지.
결과는 참담했다. 전부 떨어졌다.
경영 수업을 들을 생각은 왜 안 했을까. 대한민국에 어떤 기업들이 있는지, 그 기업에 어떤 직무가 있는지 알아볼 생각을 왜 하지 않았는지. 정말 안일했다. 관련 도서라도 좀 읽을 걸. 제대로 된 취업 준비를 안 했던 게 맞다. 일반 기업들은 서류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그나마 날 면접장까지 불러줬던 곳들이 콘텐츠 기업들 뿐이었던 거다.
그런데 훗날 MBA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다. 사람은 기업형 인재와 창업형 인재로 나뉜다고. 나는 대기업형 인재가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일하는 사람도, 윗사람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도 아니었다. 부당한 건 부당하다고 말했고, "제가요? 지금요? 왜요?"를 시전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일 잘하는 인사팀이 일찌감치 잘 걸러낸 게 아닐까. 조직에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될성부른 떡잎을.
2015년 말, 기적같이 엔터 기반 드라마 제작사 한 곳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별로 꾸미지도 않고 면접장에 갔다. "서숙향 작가 알아요?" 몰랐다. <파스타>, <미스코리아>를 봤어도 작가 이름은 몰랐다. 취업 준비만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언시 준비도 제대로 안 했던 나다. "아직 한참 배울 게 많네." 하면서도 나를 붙여주신 팀장님. 아직도 그곳에서 10년째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것도 기적이다.
그렇게 낭만주의자는 먹고는 살게 됐다. 어떻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