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세상 분투기 (1) - 이십대의 생존

낭만주의자의 자본주의 사회 생존기 (3 - 2014~2015)

by 레브뉘

1) 나의 선택, 현장의 선택


책상 앞에 앉아 안온하게 공부만 해 온 내게, 혹독한 첫 현장의 맛은 너무나 씁쓸하고 얼얼했다. 마치 쓰디쓴 감기약을 먹고 입이 텁텁 마르는 그런. 현장 경험이 없냐는 따끔한 질문에, 지레 찔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나간 현장이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첫 현장을 고르는 나름의 기준은 있었다. 곧바로 출근할 수 있을 것. 장기 프로젝트가 아닐 것. 하반기 공채 시즌이 다가오기 전에 현장을 벗어나야 하니까.


첫 현장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현장이 나를 선택한 게 맞다. 현장 경험이 1도 없었던 나는, 현장 막내로 지원을 했음에도 줄줄이 낙방을 했다. "아니, 죄다 경력직만 뽑으면 나 같은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 이 SNL 대사에 사람들이 크게 공감을 했던 2014년이었다. 프로덕션도, 감독/작가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연출/제작/기획 구분의 개념도 없었다. 보이는 필름메이커스 공고에 족족 이력서를 넣었다. 불러주는 곳으로 가야 했다.



취업을 한다는 건, 조직에서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을 매울 사람이 필요해서다. 대부분 신입 지원자들은 희망에 가득 차 입사를 한다. '열심히 일을 배워서 나도 빨리 한몫을 해야지.' 그러나 친절히 하나하나 일을 알려주는 사수를 만나는 건, 운이 정말로 좋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그 구멍을 '당장' 채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경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경력직을 찾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배우는 건 돈을 내고 학원에서 배워야지. 돈을 받고 배우려는 건 도둑놈 심보지 않나.


날 불러준 현장의 구멍은 '회계'였다. 저예산 상업영화 제작팀이었는데, 막내인 나를 포함한 제작팀 인원은 4명. PD-제작실장-제작부장 모두 남자였고, 꼼꼼하지 못했다. 꼼꼼하게 영수증 정리를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제작팀 막내이자, 제작회계 역할을 수행하며 현금 700만 원을 쩐대에 넣고 첫 현장으로 나갔다.


2) 저예산 상업영화의 탈을 쓴 포르노 현장


첫 현장에서 회계 일만 한 건 아니었다. 2억이 채 되지 않는 예산의 상업영화였기에, 일당백으로 이것저것 다 해야만 했다. 게다가. 제작팀의 본질이 무엇이던가.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한 모든 일을 하는 것 아니던가.


첫 현장은 베드씬이 많았다. 베드씬을 촬영하면, 감독님과 촬영감독님만 제외하고 여자 스텝들만 현장에 들어갔다. '컷' 소리가 울리면 커다란 담요를 들고 배우 언니를 가려주는 역할을 했다. 유달리 힘들었던 어느 날, 배우 언니가 진정을 하지 못하고 계속 부들부들 울며 촬영 거부를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PD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해당 씬의 촬영을 마쳤다. 그러나 그 이후로 두 남녀 배우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다.


훗날 다양한 현장을 경험해 보며 모든 현장이 수월하진 않다는 건 깨달았지만, 이 현장이 유달리 거칠고 야만적이긴 했다.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기 전이라 하루에 2시간 정도 자고 사우나에서 씻고 나오는 건 다른 현장도 마찬가지였지만, 36시간 카메라 롤이 지속되던 현장은 여기뿐이었다. 인천 차이나타운 올 로케였는데, 촬영 17회 차 기간 중 집에 다녀올 수 있었던 날은 딱 하루. 부모님은 이때부터 촬영이 시작되면 원래 집에 잘 못 들어오는 건 줄 알고 계신다. 첫 독립을 하고 바로 엄마 집을 나가지 않고 2~3일 왔다 갔다 했는데, 집을 구했다고는 생각을 못하고 촬영이 시작된 줄 알았다고 한다.



면접 때 운전을 할 수 있는지 묻더라. 현장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운전을 잘해야 한다는 건 들어서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땄다. 내가 첫 현장을 나간 건 2014년 6월. 운전면허를 딴 건 2014년 4월. 도로주행을 4번이나 떨어지고 5번째에 가서야 붙은 건, 묻지 않아서 얘기하지 않았다. "원래 운전은 하면서 느는 거야." 마치 '마시면서 배우는 술게임'처럼, 스타렉스를 몰라고 하더라. 아니,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결국 아주 크게 사고를 냈다.


새벽 6시. 우리가 머물던 모텔 주차장에서 연락이 왔다. 다른 손님 차가 나가야 하니 차를 좀 빼 달라고. PD님 차였다. 영화의 프로듀서는 드라마의 프로듀서와 다르다. 드라마 현장에서야 라인 PD, 제작 PD, 기획 PD, 연출 PD 죄다 PD를 달고 있지만, 영화의 PD는 하나. 그 당시 PD님은 회사 대표님이셨고, 꼬꼬마 막내인 내가 감히 깨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타렉스를 꽤나 잘 몰고 다녔어서 자신감도 붙어있었다. 차 빼는 것 정도야 뭐.


쾅. 우르르. 아니 어떻게 액셀과 브레이크를 헷갈려.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았다. 자고 있던 가족의 머리 바로 옆으로 벽돌이 와장창. 하마터면 인명 사고를 낼 수도 있었던 날이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주셨지. 그 이후론 다시는 내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더라.


3) 진짜 선택, 결과는 따르지 않는


수많은 현장을 경험하며, 나는 첫 현장을 저예산 상업영화의 탈을 쓴 포르노 현장이라 회고한다. 그러나 기억은 추억으로 미화되는 법이지. 거칠고 야만스러웠지만 정이 넘치는 현장. 첫 현장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에 바로 합류했다. 투자를 받는 게 어려운 일이란 걸 체감하며, 3개월 동안 무급으로 일하다 팀이 해산되었다. 총 4개월. 통장에 찍힌 100만 원.


2014년 하반기 공채는 별 소득이 없었다. 2013년 초심자의 행운은 끝이 났고, 현장 경험을 쌓았음에도 서류 통과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다고 필기 스터디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서류를 통과하면 한 달 안에 필기를 보러 가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적성을 이때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백지에서 작문을 쓰는 것보다, 남의 글을 봐주는 게 훨씬 재밌더라. 심지어 타율도 좋다. 작문 피드백을 봐준 스터디원들이 하나 둘 합격하여 스터디를 떠나곤 했으니. 2015년이 다가왔고, 공채는 끝났고, 다시 현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현장은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 한번 현장 경험을 쌓아서 그런지,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이 더 늘었다. 최종 두 후보는 대규모 상업영화 제작회계 서브 자리와 드라마 연출부 자리였다. 아무리 낭만을 쫓아도 월급을 많이 주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드라마 현장으로 향했다. 그때 거절한 작품이 <부산행>이었다.


드라마 현장은 영화 현장과는 많이 달랐다. 장부 식당도 없고, 각 팀들 용역료에 식대가 포함되어 뿔뿔이 흩어져 밥을 먹었다. 수도권 이내 촬영을 할 경우에는 숙박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하루에 2~3시간밖에 잘 수 없었고, 여전히 비효율과 비합리가 넘쳐나는 현장이었는데 말이다. 현장을 벗어나 '기획'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순간, 2015년 하반기 공채 시즌을 맞이했다.


2016년, 드디어 고대하던 '드라마 기획팀'으로 입사해 첫 출근을 했다.

그런데 다시 현장으로 나가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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