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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주 Aug 07. 2023

[소설]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한 사람들

-2부-

나는 이러한 불가사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RP 진단을 받고 이미 낮아진 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가던 병원에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빼고는 일상생활이 더 나아졌다. 식당에는 키오스크가 치워졌고 간판의 글씨도 커졌다. 이제는 사람들이 밤에 불러내고 늦게까지 이야기하지 않아서 좋았다. 

오늘도 전보다 글씨가 2배나 커진 유튜브에 사람들이 올리는 저시력을 극복하는 팁 영상을 보며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람들은 장애를 경험하면 차별이 줄어들까?”

나는 문득 장애를 경험했을 때 차별에 대한 생각도 줄어들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특이점이 온 지 3년이 지난 시점, 오히려 사람들은 눈이 나쁜 상황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설을 만들고 도구를 만들고 보조함으로 시스템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특이점이 온 직후에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보도가 이곳저곳에서 있었다. 그때는 나도 찾아주는 곳이 많았고 방송에도 몇 번 출연했다.

“설정에 들어가신 다음 접근성을 터치하시고요. 디스플레이 항목에서 확대/축소를 On 하시면 됩니다.”

방송에 나가서 다양한 접근성 기능을 설명하고 강연을 다녔다. 마침 접근성을 주제로 집필한 책이 시기를 잘 타고 많이 팔리기도 했다.

그리고 동료 시각장애인들도 방송에 나가거나 칼럼을 쓰며 시각장애인으로써 겪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고 관심을 호소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고 시각장애인들의 처우도 고민했다.

세상이 유니버설하게 바뀐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나도 관련 일을 하면서 모두에게 공평한 인프라가 설치되도록 그에 맞는 마인드를 가지도록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 3년이 넘는 시점에서 그에 대한 생각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당사자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 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나보다 더 좋지 않는 조금의 차이라도 발견하면 차별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어린 나이에 저시력으로 돌입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전에 좋은 시력을 가졌던 시대에 대해서 그리워했다. 숱하게 해외를 다니고 밤에 즐기던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시청하며 우울감에 빠진 사람도 많았다.     

어느 날 시각장애인 친구 용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내가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 줄 알아? 내가 전철을 타고 가는데 흰 지팡이 들고 있는 나를 보면서 엄청나게 무시하더라.”

나는 이유가 궁금해서 되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용현이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도 안 보이는 것들이 밖에 돌아다닌다고 그런데 내 느낌에 저시력이 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화풀이하는 것도 아니고..”

장애를 겪고 난 직후는 현실 부정이 지배하게 되어 공감의 영역보다는 혐오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너무 커서 혐오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처럼 느껴졌고 슬픈 일이지만 이것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울대학교 병원 유전체의학과를 다시 방문했다. 6개월마다 검진이 있었는데 특이점이 온 이후로는 1년에 한 번씩 가기에도 벅찼다. 내가 유전체의학과를 다니는 이유도 RP와 유전자는 매우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많은 유전자 검사를 받았으며 RP를 일으키는 유전자를 모두 알고 있었다. 하나는 NR2E3 또 다른 하나는 CCD2A2D 였다. 내가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이유도 해당 유전자를 정확히 알아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치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세포치료는 2020년대 초반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2014년 네이처에 처음 논문이 발표되고 2020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현재 사람들을 괴롭히는 병 역시 유전자치료가 거의 유일한 해답이었다.

“이제 눈에 주입만 하면 되나요?”

나는 유전체의학과 A 교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네, 다행히 2024년도에 식약처 허가가 난 상황이라서요. 그때는 정말 막막했었는데 우리가 매번 생쥐 실험까지 할 수 없고요. 그래도 세포 단위에서도 해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나는 이 치료를 받기 위해 5년을 대기했다. 처음에는 나의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아야 했고 두 번째는 줄기세포(IPS) 단위에서 실험해야 했다. 그리고 이 약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보려면 생쥐를 상대로 한 동물 실험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야 어떤 부작용과 면역반응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웠던 점이 모든 치료제에 동물 실험을 요구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섣불리 치료할 수 없었다. 다만 미국이나 일본은 세포 상태에서도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까지 가서 치료받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승인이 났고 시도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약을 만드는데 약 10억의 비용이 필요했고 동물실험에도 그에 상응하는 돈이 필요했다. 동물실험을 건너뛸 수 있더라도 10억이라는 돈은 절대 작지 않았다. 다만 같은 표현형을 보이는 사람들이 그룹으로 묶인다면 비용은 좀 더 저렴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아시다시피 저시력을 일으키는 병이 RP의 표현형과 같잖아요? 그러면서 서로 치료를 받겠다고 엄청나게 전화와 이메일이 쏟아지고 있어요.”

A 교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나도 치료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하필 비슷한 증상으로 보이는 병 때문에 치료 시기가 늦춰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진료받는 시간에도 계속 전화가 빗발쳤고 내 뒤로 길게 늘어선 줄이 식은땀을 나게 했다.

“교수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되물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려는 치료제가 거의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시력 회복의 효과가 있을 거에요. 다만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도 각양각색이니 그룹핑을 할 필요가 있고요. 오히려 좋게 생각한다면 이 약을 좀 더 저렴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대략 알 수 있었다. 당장의 치료를 유예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양보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용현과의 전화 통화가 다시 떠올랐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되어도 차별하고 약간의 효과가 있는 치료제도 서로 맞겠다고 돈을 들고 달려올 참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출발선에 섰다.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 해보지 못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를 포함한 동료들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진료실 밖을 나가는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그중에 저시력자도 있었기에 몇몇은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정말 치료를 포기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희를 위해서 조금 양보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로또에 1등으로 당첨되면 당첨금을 찾으러 간 은행 앞에서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지금 나의 상황이 똑같았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장애인을 위한 공공의 선을 외칠 때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같은 공공의 선을 들이대며 또 다른 희생을 강요했다. 나에게는 장애인으로 살아온 희생의 값어치는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포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곧 개발될 치료제를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억만금을 주더라도 내가 가진 치료제가 당장 필요했다.     

나는 AAV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웠다. 이 수술은 망막에 직접 컨택하는 매우 위험하고 정교한 수술이었다. 따라서 일생에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수술실 밖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응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수술대에 오른 결정적인 이유는 장애인으로 출발선에 먼저 서는 경험을 해보았고 이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장애인은 착해야 하고 이기적이면 안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무너뜨리고 싶었다. 수술을 받기 전 많은 전화를 받았고 심지어 거액을 요구하며 순서를 바꿔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 이였고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도 없고 돈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눈을 감으니 비장애인이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동네 뒷산에서 잠자리를 잡고 흰 나비를 쫓아다니며 뛰어노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병을 물려준 아버지도 생각났다. 처음에는 원망하고 한탄했던 시절이 있었고 사실 지금도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하나의 소망이 생겼다. 

“여름보다 겨울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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