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컨셉에 진심인 편

by jelome

‘컨셉’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디자인일을 하니 자연스럽게 입에 붙은 단어인가 싶었지만

나는 꽤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컨셉 정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대학시절, 친구와 '사서 고생하는 여행'이라는 컨셉을 정해

전주에서 군산까지 오직 도보로만 이동하는 여행을 하는가 하면

무채색 상하의에 쨍한 삼원색 양말을 요일마다 번갈아 신으며

이 룩의 컨셉은 'INFP의 소심한 반항'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크리스마스 홈파티를 열 때,

교회 여름수련회를 기획할 때 등

일상의 어떤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컨셉을 정해 움직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

나를 더 잘 설명하고픈 욕망과

익숙한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려는 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마치 프롤로그 한 줄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듯,

나를 순식간에 몰입하게 했다.



컨셉은 니즈에서 출발한다


컨셉은 아이디어일까, 톤앤매너일까, 아니면 그저 느낌일까.
브랜드 관점에서의 컨셉은 비교적 그 의미와 쓰임이 명확하지만,
막상 실무에 들어가면 이 단어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어떤 순간엔 솔루션이 되고,
또 어떤 순간엔 방향성이 되고,
어떤 때에는 시각적 모티브가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컨셉의 시작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컨셉은 늘, ‘니즈(needs)’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 니즈는 클라이언트의 개인적인 바람이 될 수도 있고,

리서치를 통해 발견된 소비자들의 필요일 수도 있다.



문턱 낮추기


어느 날, 한 산부인과 병원 사이니지 작업을 맡게 되었다.

원장님은 하와이에서 오래 머물다 오신 분이었는데

한국은 산부인과 방문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경직되어 있는 것 같다며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부담없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 말은 단지 원장님의 취향이 아니라,

병원을 찾는 이들이 가장 바라는 정서적 분위기이기도 했다.


"벽면 한 쪽에는 서핑보드를 걸어 둘거구요,

벽걸이 TV에는 훌라춤 영상을 틀어놓을 거에요.

보기만 해도 릴렉스 될 것 같지 않나요?"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는 아이디어였지만,

컨셉의 줄기가 명확했기에 걱정은 없었다.

밀도와 톤은 디자이너가 다듬으면 되는 일이다.


이런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면 내 눈은 반짝인다.


견적과 시간이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도 물론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관점을 가진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디자이너가 시도해볼 수 있는 영역은 훨씬 넓어진다.

그래서 경험과 배움을 갈망하는 디자이너에게는

이런 만남이 무척이나 소중하다.


우리는 하와이의 선셋, 꽃, 식물 등을 시각적 모티프를 쓰되,

그걸 과잉된 꾸밈이 아니라 정서적 환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조명은 웜한 컬러로, 외부 유리도 전체 썬팅이 아닌 일부를 노출시켜

개방감을 주는 동시에 밖에서 봤을 때도 내부의 즐겁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했다. 컬러는 따뜻하면서도 활력있는 회화적 톤을 사용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명확한 컨셉이 있을 때,
디자인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컨셉은 니즈에 반응하는 방식이 되고,
사람과 공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돕는 통로가 된다.


컨셉의 흐름을 잡고, 이미지를 구체화 시키고, 그걸 감각적으로 전하는 일.

그게 바로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이다.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Q1. 당신이 최근에 ‘컨셉’을 정해본 순간은 언제였나요?

Q2. 당신이 최근 마주한 공간이나 브랜드 중, '인상적인 컨셉'을 가진 곳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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