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편집디자인 일을 주로 했다.
네모반듯한 화면과 종이 위에서 펼쳐지는 평면적인 디자인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마음 한켠엔 입체적인 물성이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로망이 늘 있었다.
지금은 디자인이 화면 밖을 벗어나 물성이 있는 결과물로 구현되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모니터로만 보던 시안이 커다란 부피감을 가진 물체(物體)로, 또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어딘가에 자리 잡은 모습을 볼 때 그것은 꽤 큰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 즐거움에는 '소재'가 큰 몫을 한다.
그라데이션으로 금속을 표현해도,
텍스처 이미지를 바탕에 깔아도 화면상에서는 소재의 질감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물론, 필자가 주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일러스트레이터고, 요즘은 실제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3D 툴과 AI 기반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이것 역시 2D 공간 안에 3D를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입체를 디자인하는 것의 완성은 실제적인 '소재'라고 생각한다.
"고급스럽게 해 주세요."
클라이언트들에게 정말 많이 듣는 말이다.
이 말을 다르게 풀어보면, 우리 브랜드가 가치 있어 보이게 해 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기에서 '소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소재를 고를 때 고려해야 할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가격... 잘 좀 부탁드려요."
업체를 선택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우리를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건 단연 '견적'이다.
특히 사이니지 업계는 가격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견적을 조정할 수 있는 대표 항목은 수량, 크기, 소재 — 그중 소재는 퀄리티와 직결되기 때문에
요즘 같은 불경기엔 소재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는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퀄리티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선택과 집중
모든 사인에 동일한 힘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동선상 중요도, 시선 집중도, 기능적 역할에 따라 소재와 사양에 강약을 조절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외부 입구 사인과 실내 안내 사인은 동일한 재질로 만들 필요가 없다.
브랜드 인상에 직접 영향을 주는 포인트에만 고급 소재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선에서 절충할 수 있다.
소재의 전략적 배치는 비용 절감이 아니라, 전체 퀄리티 유지를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시안으로 지갑 열기
말보다 보여주는 것의 힘은 크다.
우리는 종종 견적이 결정되기에 앞서 저가 중심의 A 시안과 고사양의 B 시안을 견적과 함께 제안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선택되더라도, 견적과 퀄리티 두 마리 토끼를 완전히 잡았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다른 업체로 이탈하는 위험은 확실히 줄어든다.
실제로, 처음엔 저가를 고집하던 클라이언트도퀄리티가 높은 시안을 보게 되면
"이 정도면 좀 더 써도 되겠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선택권을 주는 것, 그것이 곧 설득의 시작이다.
기존의 것 최대한 활용하기
기존의 사인 구조나 설치 지점을 재활용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새로 제작하지 않아도, 패널만 교체하거나 필름만 입히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인상을 줄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예산을 아끼면서도 공간 전체의 퀄리티를 해치지 않는 좋은 절충안이 된다.
소재는 분위기(무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분위기는 특수한 공간을 제외하면 시작과 끝이 동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디자인 초기 단계에서 컬러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소재도 함께 고려되면 더욱 효과적이다.
전시관의 경우 여러 개의 관마다 컬러 계획이 달라지기 때문에 건축 쪽에서 전달한 마감재 도면을 참고하며 소재에 대한 계획도 함께 세우곤 한다.
컬러와 소재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블랙이나 다크한 톤을 사용할 경우 스테인리스의 차갑고 세련된 느낌이,
웜화이트나 베이지 톤을 사용할 경우 우드 소재의 따뜻함이 어울린다.
만약 신규 공간이 아닌 기존 인테리어가 있는 경우라면 기존 마감과 조화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퀄리티는 소재 자체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얼마나 일관된 톤 앤 매너를 유지하는지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기존 인테리어를 고려해 그에 맞는 소재를 정한다면
소비자의 공간을 통한 브랜드 경험은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공간의 분위기에 이어, 클라이언트의 특성 혹은 브랜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브랜드의 성격과 특성은 좀 더 가치적인 이야기다.
모든 브랜드가 '고급'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앞서 많은 클라이언트들이 '고급스러운' 사이니지를 요청하지만
이는 사실상 '알잘딱깔센'처럼 추상적인 표현일 때가 많다.
결국 가장 자신들에게 맞는 것을 제안해 달라는 의미다.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브랜드라면 리사이클링 가능한 소재를,
고가의 서비스나 제품을 제공하는 브랜드라면 고급 금속이나 특수 마감 소재를,
공공기관이라면 접근성, 유지보수성, 안전성을 우선한 소재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소재를 고른다는 건 단순한 자재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브랜드의 방향과 공간의 분위기를 현실 안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Q1. 요즘 자주 사용하는 소재가 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Q2. 여러분이 소재를 고를 때 가장 우선시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