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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Jul 08. 2020

폭력이 일상이었던 야만의 시대

나이 들면 진보가 돼야 ... 대세인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저항하기로 

 1967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왕십리의 무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의 직장이 있던 뚝섬에서 가까운 왕십리로 우리 집이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김흥국의 ‘59년 왕십리’에 등장하는 왕십리. 1976년 개봉한 ‘왕십리’라는 영화도 있다. 당시 육합춘이라는 중국집 앞에 고 신성일이 서 있는 스틸 사진이 신문에 실렸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Wang Sib Ri, My Hometown였다. 

 왕십리로 이사하기 전 나는 영등포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살았다. 오래 전 내가 태어난 이 동네를 찾은 적이 있다. 내가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오류국민학교, 내가 자란 오류동교회를 기준점으로 그 시절 하굣길을 되짚어 봤다. 내가 살던 집은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실향민이다. 고향을 찾아도 이미 옛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전학한 학교의 우리 반은 100명이 넘었다. 2부제 수업을 했는 데도 그랬다. 말 그대로 콩나물 교실이었다. 지난해 여름 인터뷰하기 위해 만났다 우연히 국민학교 7년 선배임을 알게 된 박용기 박사는 자기가 다닐 땐 3부제 수업을 했다고 들려줬다.  

 그 시절 나는 체구가 작았고 유약한 성품의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 서고 싶어 했다. 우리 반엔 손 아무개라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를 못했고 주목도 못 받는 요즘 말로 ‘찌질이’였다. 지금 내 나이쯤 됐을까? 나이가 많은 남자 담임은 그 애를 발 아무개라고 불렀다. 막 전학 온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러는 담임이 유치해 보였다. 한번은 담임이 슬리퍼를 벗어 들어 그 신발로 애의 얼굴을 때리면서 발 아무개라고 모욕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떨구고 내가 당한 일인 양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폭력이 일상인 야만의 시대였다. 언어폭력도 심했다. 한영중 3학년 때 나의 담임은 준수한 외모에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긴 중년의 신사였다. 여의주처럼 생긴 작은 막대기를 들고 다녔는데, 그 막대기로 학생의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이분은 어쩌다 학생의 행실이 못마땅하면 빈정거리듯이 “니 애비가 그러더냐”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이 몹시 거슬렸다. 아들의 행실로 인해 왜 애먼 아버지가 ‘애비’ 소리를 들어야 하나? 한번은 담임이 반 친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애비가 뭡니까?” 교실에 긴장감이 돌았다. 그보다 가벼운 저항을 한 학생도 교사가 수틀리면 쥐 잡듯 하던 시절이었다. 담임은 그러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직선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교인 서울고가 있던 경희궁은 나에게 모태와도 같은 곳이다. 경희궁 앞을 지나는 길이면 짬을 내 들르곤 한다. 


 서울고 3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교문 지도를 마친 우리 학교 선배 교사가 우리 반이 수업 대기 중이던 본관을 향해 걸어오는데 누군가 창밖을 내다보다 냅다 욕을 했다. 그 선생님이 그날 두발 단속에 걸린 학생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 고속도로를 냈기 때문이었다. 고3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실로 뛰어올라온 선생님은 욕을 한 학생을 잡아내려 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었다가는 죽음이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종례를 마칠 때까지 제 발로 찾아오지 않으면 “자동으로 3운동장 집합”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우리 학교엔 운동장이 셋 있었다. 제일 작은 3운동장은 복원된 경희궁 뒷산에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일제가 강점기에 철거한 경희궁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장이었던 나는 종례를 마친 후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 다녀갔어. 해산~” 다녀갔을 리 만무했다. 제자이자 까마득한 고교 후배에게서 공개적으로 쌍욕을 들은 선생님의 분이 그 새 풀린듯했다. 걸핏하면 군대식 단체 기합을 받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학교는 ‘까라면 까는’ 상명하복의 병영 문화가 지배했다. 군사정부 하 고등학교와 대학엔 교련 과목이 있었고 교련 시간이면 교련복을 입었다. 목총(모형 총기)을 들고 제식훈련을 했고 열병도 했다. 군사훈련이나 다름없었다. 교련 교사들은 예비역 장교였는데 평소 군복 차림이었다. 이들은 체육 교사들과 더불어 학생들의 규율 잡는 역할을 도맡았다.  

 나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2학년을 마친 후 공군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다. 1979년 여름이었다. 대전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 후 공군본부에 배치됐고 공군참모총장 당번병으로 근무하다 전역했다. 졸병 때 고참들에게 맞으면서 나는 나중에 졸병을 때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제대할 때까지 나와 한 이 약속을 지켰다. 그 시절 뒤늦게 전입 온 바로 아래 한 달 졸병이 군악 특기였다. 입대 전엔 몰랐지만 대학 동기로 음대생이었다. 그는 음대엔 빠따를 때리는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군악대 출신의 예비역들이 병영 문화를 학원에 이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행사가 많은 의장대와 군악대는 전통적으로 군기가 세다. 얼마 전 인터뷰한 고려대 의대 교수는 의대도 과거 빠따가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고교 방송반 반장 시절 나는 1년 후배 반원들을 빠따 친 적이 있다. 방송실에 있는 마이크 스탠드가 도구였다. 단 한 번이었지만 무지막지하게 쇠파이프로 때린 것이다. 그로부터 꼭 1년 전 나도 동기들과 함께 1년 선배였던 전임 반장에게서 마이크 스탠드로 빠따를 맞았다. 얼마 전 만난 방송반 1년 후배는 방송반 시절 나에 관한 기억 중 하나로 빠따를 치던 모습을 소환했다. 잘나가는 드라마 공중파 PD 출신으로 프로덕션 사장인 그는 그때 피멍이 들었다고 말했다. 군 시절 구타를 하지 않은 건 내 몸에 각인된 병영 문화를 정작 병영에 있는 동안 거부한 것이다. 

 복학 후 대학 선생이 되어 보겠다고 진학한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까지 나는 주류로 살았다. ‘뺑뺑이’로 입학한 고교 시절에도 입학 성적이 좋았기에 당당했다. 대학원 때 학비 보조를 받기 위해 학과 사무실 조교를 한 일이 있다. 나처럼 본과 출신이 아닌 타과, 심지어 타대 출신은 근로장학금과 연계된 사무조교 자리조차 얻기 어려웠다. 나는 교수 연구실 조교 ‘낙점’이야 연구실의 ‘주인’인 교수가 하지만 사무조교만큼은 차별 없이 희망자에게 고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타과 출신 여학생, 타대 출신 여학생과 셋이 교대근무를 했다.   

 석사학위 논문을 썼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사용한 ‘커뮤니케이션학의 토착화’라는 용어에 대해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도교수가 강함 거부감을 보였다. 논문심사 주심을 맡은 그는 논문 발표회장에서 “학문의 세계엔 일반화밖에 없다”고 코멘트했다. 나는 논문을 인쇄할 때 토착화를 ‘한국적 적응’이라고 고쳐야 했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지 않고 취직하겠다는 나를 말리는 선후배들에게 나는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에게 계급장 떼고 얘기해 보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은사와는 안 되더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나이로 서른에 중앙일보에 특채로 입사했다. 신문사 앞엔 우리 회사 사람들이 자주 찾던 남강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밤이면 여기서 다른 부문 선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수시로 합석을 했다. 한번은 새카만 신입이 까불까불하자 공채 1기였던 대선배가 물었다 "너 몇 기생이니?" “저는 기생이 아니라 회사와 공생합니다.”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대선배는 기가 찼는지 웃었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애주가에 호방하면서도 너그러운 분이었다. 

 신문사 시절 난 비주류였다. 공정보도위원회 간사로 있는 동안 시사지 부문으로 사실상 방출됐다. 차장 때 부장급 보직인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이 됐지만 최단명에 그쳤다. 취업 전 주류이던 시절 나는 용광로처럼 주류는 비주류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철을 만드는 고로엔 철광석과 더불어 연료인 코크스를 넣는다. 고온에서 녹은 철광석에서는 선철이 나온다. 주류와 비주류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비주류이던 신문사 시절 나는 조직 논리에 순응하지 못했다. 

 "젊어서 진보 아니면 가슴이 없는 거고, 나이 먹고도 보수가 안 되면 머리가 없는 것"이란 말이 있다. 이 잣대를 들이댄다면 난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난 나이가 들면 오히려 진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적 삶은 이 시대의 대세인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저항하는 것이다. 

 사실 젊어서는 생존을 위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체제에 적응하고 이들이 만든 잣대에 맞춰 살아야 한다. 성공하려면 세상과 조직이 원하는 대로 처신해야 한다. 그렇게 사느라 때로는 부끄러워 나는 하늘을 우러르기는커녕 짐짓 외면했다. 그런데 6년여 전 정년퇴직하고 나서 조직 논리에서 자유로워졌다. 여전히 ‘배운 도둑질’을 하지만 내가 종사했던 언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나이를 먹으니 성공은 더 이상 인생의 목표도 아니다. 나이 들어 보수화하는 건 사실 기득권 때문이다. ‘딸깍발이’ 기자로 살다 보니 사실 이렇다 할 기득권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양극화된 세상을 바라지 않았다. 이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려면 지금의 기득권적 사고와 행동 원칙을 바꿔야 한다. 세상은 결코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 저절로 좋아지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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