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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Jul 12. 2020

여자를 쉽게 대상화하는 한국 남자

노추, 노욕, 빈곤... 신노년의 세 가지 화두 

 나는 딸과 아들이 각각 하나이다. 딸·아들 순으로, 네 살 터울이다. 가족 톡방에서 두 아이를 호명할 때면 서열 순으로 뜰(딸) 앤 아들이라고 부른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세월호 아이들과 동갑내기이다. 4년 내내 학교가 있는 용인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ROTC를 해 지난 봄 임관했는데 코로나 사태로 졸업식도, 임관식도 못했다. 

 아이들의 고교 시절 우리는 서울 쌍문동 언저리에 살았다. <응답하라 1988>의 무대 쌍문동. 드라마에 등장하는 쌍문고와 쌍문여고는 현존하지 않는 학교다. 두 학교의 모델은 각각 선덕고와 정의여고이다. 아들은 선덕고를 나왔고, 딸은 정의여중 출신이다. 코로나로 인해 요즘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가족은 정의여고 강당에서 예배드리는 높은뜻정의교회를 섬긴다. 최근엔 안전수칙을 지키느라 현장 소모임도 중단됐다. 

 고교 시절 이래 우리 아이들의 공식적인 통행금지 시각은 자정이다. 아들은 대학 기숙사에 있는 동안 주말이면 집에 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렸다. 종종 통금시각을 넘겨 귀가하기도 했다. 남자 대학생에게 모처럼 집에 온 주말에 자정 전 귀가하라는 건 사실 무리한 요구이다. 쌍팔년도는 아니었지만 77학번인 나도 그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자정을 넘겼다. 

 지금은 독립해 모 대기업에 다니는, 당시 대학생이던 딸이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집 통금시간이 사실상 남녀 차별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자정을 넘기게 되면 누나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라고 얘기했다. 아들이 몇 번 시도했지만 딸은 들어주지 않았다. 통금 성차별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양성평등을 주장해 온 나로서는 대략난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늦으면, 동생이 늦을 땐 하지 않는 한 가지 걱정을 더 하게 돼. 아빠 말, 알아들어?”

 알아들었는지, 아빠 맘을 읽었는지 딸은 그 후로 이 암묵적인 통금 성차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의 처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롱(wrong) 타임, 롱 플레이스에 롱 퍼슨과 함께 있으면 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여자에게 한국의 24시 이후는 롱 타임-위험한 시간이다. 언제부터인가 밤길 특히 심야에 앞에서 여성 혼자 걸어가면 나는 다소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걷는다. 나의 발소리, 어쩌면 가로등 불빛에 일렁이는 나의 그림자에 앞의 여성이 위협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1977년에 입학한 대학 시절 이 나라엔 통행금지가 있었다. 밤 12시면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이때 거리를 벗어나 어디든 들어가지 않으면 통금 위반으로 근처 파출소 신세를 져야 했다. 군대에 가기 전이었던 1~2학년 때 학과 동기들, 몇몇 복학생 선배들과 어울려 신촌 거리를 활보하다 또는 어느 술집에서 이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서둘러 들어갈 곳을 찾았다. 어느 집 앞에나 있던 콘크리트 쓰레기통을 엄호물로 몸을 숨겨 이동해 들어간 신촌의 여관방에서 우리는 여관주인이 틀어주는 야한 비디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장미여관이 아니라도 좋았다. 

 이 통금을, 권력의 공백기에 쿠데타로 집권해 철권통치를 한 전두환 정권이 없앴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시절 나의 대학 은사 최정호 교수는 한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사람은 낮의 자유를 지니고 태어나듯이 밤의 자유도 지니고 태어난다.”

 조간이었던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최 교수는 이 신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자신이 한국일보 대학을 나왔다고 썼다. 통금에서 자유로웠던 조간신문 기자였기에 밤의 자유가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심야 통금처럼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부자유가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자유주의자로서 나는 이런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중세를 암흑기라고 하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음란 비디오는 고교 시절 어쩌다 동기가 학교 뒷산에서 건넨 조잡한 음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 본 손바닥 반만 한 음란 사진은 파격적이었지만 화질이 형편없었다. 수간을 담은 사진도 있었다. 성에 늦게 눈뜬 내게 여관방 야동 속 환락은 신세계였다. 

 줄기차게 자기 경계를 하지 않으면 나이들어 노추를 피할 길이 없다.  


 나는 내 또래의 보통 한국 남자는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여자를 대상화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주의적 교육, 제대로 된 성교육 없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된 성 인식 등이 원인일지 모른다. 어쩌면 남자란 태생적·구조적으로 여자를 대상화하기 마련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자에게 실수하지 않으려면, 아니 본의 아니게라도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면 또는 여자 문제로 인해 실패하지 않으려면 자기 경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열 사람 몫을 살다 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허망한 죽음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구본창 WLK(We Love Kopino) 설립자는 필리핀의 코피노 엄마들이 한국인 생부에게서 양육비를 받아내도록 돕는 일을 한다. 코피노는 ‘코리안(Korean)’과 필리핀 사람을 가리키는 ‘필리피노(Filipino)’의 합성어다. 한국 남성과 현지의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다. 총 4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코피노는 스물네 살의 어엿한 성인이다. 대학 후배이기도 한 구본창 씨와의 인터뷰 때 나는 한국 남자들이 왜 필리핀 동거녀,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버리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부장주의적 가치관에 의해 굴절된 성의식,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 사람들에 대한 비뚤어진 우월감 등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래 전 신문사 시절 부원들과 함께 손길승 전 SK텔레콤 명예회장(당시 SK그룹 회장)과 저녁식사를 한 일이 있다. 그때 그와 나란히 앉아 나눈 긴 대화를 나는 인터뷰 기사로 썼다. 그에 앞서 잠깐 출입한 국회에서는 당시 집권 민자당의 명대변인이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 두 사람은 그러나 훗날 젊은 여성과의 부적절한 신체 접촉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상대 여성과 나이 차가 너무 나다 보니 딸도 아니고 “손녀 같아서”라고 변명을 해야 했다. 신문사 시절엔 일 잘하는 몇몇 동료가 성희롱·성추행으로 조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피해자는 대개 인턴기자 같은 조직의 약자였다. 한 여자 선배는 그런 혐의를 받는 남자 선배가 퇴직할 때 회식자리에 나가지 않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의 회사원 딸내미는 여성으로서 회사 생활에서 겪는 각종 불이익에 대해 분개한다. 성적 이슈에 휘말리지 않으려 남자 상사들은 남자 후배와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한다. 일종의 펜스 룰이다. 나는 조직생활을 하는 동안 여자 후배들에게 불이익을 준 적 없나? 딱히 기억나는 일은 없지만 당사자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나는 성장하면서 집에서 생리대를 본 일이 없다. 이사를 많이 다녔고 큰집에 살아 본 적이 없지만 어머니와 두 살 위 누나는 이 ‘은밀한’ 물건을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 그 시절 가족들과 허심탄회하게 많은 대화를 한 건 아니지만 성을 주제로 한 대화는 금기였다. 성교육은 생각도 못했던 시절이다. 이렇게 자라 야동으로 처음 접한 여성의 몸은 성적 욕구 분출의 통로 같은 것이었다. 지나친 말이지만, 어쩌면 ‘배수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그릇된 성의식에서 이제라도 벗어나려 한다. 제때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고 피해자연할 수는 없다. 배우지 못했다고 면책되는 건 아니다. 아닐 말로 나라고 '손길승'이나 '박희태'가 되지 말라는 법 없다. 

 백수를 넘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액티브 시니어의 대명사이다. 학창 시절 그에게서 나는 철학개론을 들었다. 지난해 41년 만에 만나 인터뷰했을 때 그는 80대 중반이 되면 대개 혼자가 되는데 홀로 남으면 재혼을 권한다고 말했다. 재혼이 어려우면 연애라도 하라고 했다. 그는 80대 중반까지는 남성성을 유지한다고 털어놓았다. 90세가 되면 그마저 잃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때까지는 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이야기로 들었다.  

 100세 시대 곱게 나이들어가는 건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과제다. 무엇보다 노인 빈곤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노욕과 노추를 피해야 한다. 신노년의 세 가지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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