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주의와 보수적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자란 문화적 보수주의자의 고백
아들이 귀를 뚫었다. 올해 초 대학 졸업과 ROTC 임관을 한 달 남짓 앞뒀을 때의 일이다. 아들이 어느 날 귀고리를 하고 나타났다. 아내에게 “입대 전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겠다”고 했다더니 위시 리스트에 귀 뚫기가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눈썹과 코에 피어싱도 하고 싶어 하는 걸 “아빠가 싫어한다”며 아내가 말렸다고 한다. 그 다음 주말 아들은 기어코 눈썹 피어싱을 하고 들어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머리는 제 손으로 노랗게 염색을 했다.
입영 전야는 아니었지만, 군대 가기 전의 그 헛헛함과 일탈심리를 알기에 나는 덤덤한 척했다. 어차피 대한민국 육군 장교에게 귀고리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버킷 리스트까지야 아니었겠지만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아들은 지금 포병 소위로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부대에 복무 중이다.
아들이 자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아빠는 남자가 귀고리 하는 거 별로야.”
아들이 나중에 귀고리를 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유시민 작가의 글쓰기 책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세대 전 그가 독일에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텔레비전 뉴스가 독일 사회민주당 전당대회 전야제를 다뤘다. 당 지도부 인사들과 청년 당원들이 테크노 댄스를 추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 그런데 한 여성 청년 당원이 귓바퀴에 피어싱을 여러 개 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독일 학생 둘이 유 작가 앞에서 논쟁을 벌였다.
“미친 것! ... 저 피어싱 말이야. ... 저런 금귀고리를 열 개나 달고 다닐 돈으로 아프리카 어린이들 학교 보내는 데 후원이나 하면 좋잖아!”
다른 학생이 “그럼 피어싱 말고 그냥 귀고리 한 쌍은 어때?”하고 받았다. 욕설을 했던 학생이 “그거야 뭐, 괜찮지” 하고 반응했다. 이렇게 시작된 논쟁은 ‘미친 피어싱’이라고 한 학생의 패배로 끝났다.
귓바퀴에 하는 피어싱과 일반적인 귀고리 한 쌍은 어떻게 다를까?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서부터 비정상인가? 정상성 즉 정상적 장신구와 비정상적 장신구를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없다. 신체에 낸 구멍에 끼우는 장신구의 착용 부위나 개수에 대해 정상성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후 유 작가는 남의 취향을 두고 논쟁을 벌이지 말라고 권한다. 납득이 안 되는 남의 취향에 대해 미친 짓이라고 도덕적 가치 판단을 내릴 수는 있지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 정당성을 논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글쓰기 강의 때면 이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한다.
나는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평생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러다 몇 달 전부터 깎을 때가 되면 아내를 '대동'하고 동네 미장원에 가 머리를 커트한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숱이 줄어들어 아내가 파마를 해 보라고 권하지만 나의 소화 능력을 넘어선다며 한사코 뿌리친다. 나는 일찍이 나의 이런 보수적인 문화 취향을 아이들에게 전승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적 내 취향이 아닌 것을 접할 때면 “아빠는 저거(취향) 별로야” 하고 넌지시 말하곤 했다.
춘추 시대 공자에게 제나라의 군주 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 위치에서 본분에 맞는 덕을 실천할 때 올바른 사회 질서가 세워져 정명의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이다. 나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정명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서 언젠가 직장에 다니는 딸내미에게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딸이 곧바로 “남자다운 게 뭐냐”고 반문했다.
“가족이 위험에 처할 때 앞장서 대처하고…”
딸이 바로 반격했다.
“그게 왜 남자다운 건데?”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도 설명하기 벅차지만 나는 여전히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다움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치들도 있다. 제 몸을 뚫어 착용하는 장신구, 파마머리는 여성적인 것이라는, 설명할 길 없는 고루한 생각을 나는 버리지 못한다.
딸.아들 방문의 날 온 식구가 별내 카페 거리를 찾았다. 팔순의 아버지도 동행했다.
1970년대 후반 대학 시절 나는 기독교 연합 동아리를 했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가 창립한 다락방전도협회 대학부에 소속된 동아리였다. 주로 모여서 독서 토론을 했고, 방학 때면 지방으로 전도 봉사를 갔다. 여자 동기들 중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시절 나 자신도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피우는 여자 동기들을 삐딱하게 봤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울 때와 달리, 담배 피우는 여자는 불량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결혼하면서 담배를 끊었지만 그 친구들은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 여성학을 전공한 한 친구는 대학에 몸담았다. 40여 년째 지켜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건전하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친구이다.
기독교 모태 신자인 나는 기독교를 통해 신을 만났다. 언제든 배교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일정 반경 이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집안 분위기는 보수적이었고 내가 성장한 교회도 보수적이었다. 대학 때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담임목사가 인도하는 집회 전에 내가 싱어롱 인도를 맡았다. 자연스레 앞자리에 앉게 됐다. 담임목사가 찬송가를 부르자고 하면서 박수를 치게 했다. 다들 박수를 쳤지만 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복음성가 부를 땐 박수를 쳐도 되지만 찬송가는 박수 치면서 부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근거 없는 지독한 이분법이었다. 담임목사가 계속 요구했지만 나는 끝까지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러자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담임목사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자네는 아버지가 장로이신데 왜 박수를 치지 않나?”
이 신경전에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게 부당하다고 느낀 나는 이렇게 지르고 말았다.
“아버지가 장로이지, 제가 장로입니까?”
얼마 전 만난 그 시절 친구가 이 사건을 소환했다. 담임목사의 권위에 도전하던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찬송가를 부를 때 집회 인도자가 박수를 치라고 하면, 친다. 소극적으로나마 박수를 친다. 아닐 말로, 담배를 피울 때조차 기도를 해도 되느냐고 교황에게 물었다는 수사처럼 박수를 칠 때조차 나는 찬양을 한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좌충우돌하던 그 시절 우리 연합 동아리의 지도 목사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옥에 갔다”고 얘기한 일이 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 치기 넘치던 시절 나는 이렇게 받아쳤다.
“성삼문이 지옥에 갔다면 저도 지옥에 가 성삼문 옆에 거적대기 깔고 앉아 있겠습니다.”
성삼문은 과연 지옥에 갔을까? 이 의문을 대학 후배이자 신학대 교수인 다른 목사가 풀어줬다. 자신도 이 의문에 빠졌었고 그래서 의문을 풀려 신과대에 진학했다는 그에게 모교의 유동식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200여 년 전 선교사 등에 업혀 이 땅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무릎을 칠 만한 명답이다. 성삼문이 사후에 어디에 갔는지 우리는 모른다. 유한한 인간은 신의 섭리를 온전히 알 길이 없다. 우리가 모르는 건 모르기에 모른다고 해야 한다. 유동식 교수의 명답을 전해 준 손원영 교수는 3년여 전 한 기독교 광신자가 개운사의 불당을 훼손했을 때 페이스북에서 불당 회복을 위한 모금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몸담았던 서울기독대에서 파면당했다. 소송 끝에 지난해 파면 무효 확정 판결을 받았고 서울기독대 이사회가 그의 재임용을 결정했지만, 안타깝게도 총장 등 일부 구성원들의 반대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대학원 시절 성당에 다니는 가까운 후배가 있었다. 주말을 보내고 학교에서 만나면 자연스레 주말에 어떻게 지냈는지가 화제가 됐다. 보통 일요일엔 둘 다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엔 밖으로 나가 한 잔 했다. 나중에 신부가 된 후배는 수시로 보좌신부와 성당 앞에서 한 잔 했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들과 교회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한 잔 했다.
언젠가 내가 섬기던 교회 부목사로 있던 분에게 이렇게 물은 일이 있다.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드셨을까요?"
질문의 의도를 간파한 그가 껄껄 웃으며 답했다.
“드셨겠죠. 드셨어도 아마 많이 드셨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공동번역 누가복음 7장 34절)
김해원 동화작가는 "대개의 사람에게 삶이란 부모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고 썼다. 나는 나의 두 아이가 나에게서 멀리 달아나기를 바란다. 내가 갇힌 보수적인 문화 취향의 한계를 훌쩍 넘어섰으면 싶다. 어쩌면 달아나려 해도, 내가 그랬듯이 아마도 일정 반경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서 취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이 벌써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부모와 자식 간엔 변증법적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 부모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부모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닐까? 그렇게 이 사회가 진보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