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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Aug 09. 2020

진보세력은 도덕적 우위를 잃었다

정파를 떠나 정치 자영업자들의 볼모가 된 한국 사회  

 지난 봄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나는 정의당에 정당 투표를 했다. 4년여 전 20대 총선 때도 정당 투표는 정의당에 했었다. 지역구 투표는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했었다. 그런데 21대 땐 지역구 투표를, 투표소까지 걸어가서 적극적으로 기권했다. 민주당의 ‘위성 정당 따라 하기’에 대한 반대의 의사 표시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낮았다면 아마 망설였을 것이다. 

 이 일로 민주당 지지자인 아내와 투표소로 가는 동안 티격태격했다. 손을 잡고 걷던 아내가 결국 내 손을 뿌리쳤다.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내내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법 개정을 주도한 집권 민주당이 선거법을 무력화하는 위성 정당을 만든 건 민주개혁 세력의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노태우 정권 시절 3당 합당만큼이나 반민주적인 폭거라고 여긴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야 한다.

 나는 구순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1935년생인 아버지는 나보다 스물세 살 연상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세 식구의 가장이었고, 스물다섯에 나의 동생이 태어나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그 세대가 그랬듯이 나의 부모들은 신산한 삶을 살았다. 그 세대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의 부모의 가족사는 한 편의 소설이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7남매 중 장녀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지만 장녀를 유독 아꼈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에 들어앉아 살림을 해야 했다. 어릴 적 학교에 제출하는 가정환경조사서에 어머니의 학력을 아버지는 중졸이라고 적어 넣었다. 나는 어머니가 알파벳을 읽지 못했기에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8년 전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 아버지는 당신 뜻에 따라 독거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사셨지만 나는 아버지를 자주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러다 덜컥 병이 나시는 바람에 두 집 살림을 합쳤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 드렸다. 

“(합치는 거 말고는) 아버지도 대안이 없고, 저도 대안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가장”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의 아내는 50대 중반에 덜컥 홀시아버지를 모시게 됐다. 자신의 인생 계획에 없던 일이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개봉 후 “다 계획이 있다”는 대사가 유행어가 됐지만, 인생은 대부분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 집은 3대 가정이다. 그런데 지난해 회사 다니는 딸이 독립을 했다. 그에 앞서 우리 집의 유일한 출퇴근자인 딸의 통근 편의를 위해 우리는 서울 도봉구에서 일시적으로 동대문께로 이사를 했었다. 대학로 반대편 쪽 낙산 자락, 그 시절 나는 낙산을 거쳐 마로니에 공원까지 산책을 다녔다. 내 생애 대학로까지 걸어서 다니는 일도 내 인생 계획엔 없던 일이다. 대학로엔 학림다방이 있다. 공군 사병 시절 외출을 나오면 어쩌다 귀대 전 학림다방을 찾았다. 1970년대 중반 고교 시절 교사들의 눈을 피해 여학생들과 미팅을 한 성베다관도 대학로에 있었다.  

 딸은 자기 때문에 시내 쪽으로 이사했는데 어느 날 독립을 하겠다고 말했다. 딸의 독립선언을 아내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월세를 감안해 딸은 지척의 오피스텔로 이사했고 아내는 한동안 빈둥지 증후군을 앓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젊은 날도 부모에게서 유산처럼 물려받은 신앙으로부터 달아나려 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어느 날 돌아서 내가 서 있는 지점을 보니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기독교 모태신앙인 나는 언제든 배교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일정한 반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나오는 로드리고 신부와 같은 방식으로 배교를 강요 당한다면 나는 배교할지도 모른다. 

 딸과 네 살 터울인 아들은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부대에서 포병장교로 복무 중이다. 용인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 대학생 때처럼 주말에 어쩌다 집에 온다. 3대 가정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2대 세 식구의 단출한 가정이다. 

 아침이면 나는 아버지와 둘이 식사를 한다. 계란 삶는 기구에 내가 계란을 삶고 토스터에 빵을 굽는다. 사과도 한 알 깎는다. 토마토를 먹을 때도 있다. 한동안 커피를 내리다가 얼마 전 인스턴트 커피로 바꿨다. 이 일은 본래 아내가 하던 것이었다. 아침 준비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에게 어느 날 자청해 내가 아침식사 당번을 하겠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다. 전쟁 통에 먹고살 일이 막막해 열여섯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하셨다. 공군 사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북한군 포로의 신문을 담당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자는 아침 식탁에서 정치를 주제로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때마다 번번이 의견이 갈린다. 그래도 나는 이 세대 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오래된 ‘안보 보수’이다. 80년 광주에 북한군이 투입됐다는 이야기를 카카오톡으로 받고서 입에 올리신 일도 있다. 아버지도 모르시지야 않겠지만, 나는 메신저나 유튜브는 공신력 있는 미디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과거 보수 정권이 안보를 더 튼튼히 한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만일 계층 투표를 한다면 아버지가 보수 정당에 표를 줄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한국의 보수가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동떨어졌듯이 진보는 도덕적 우위를 잃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나는 여러 날 아침식탁에서 지역구 투표는 누구에게 하든 정당 투표는 어느 위성 정당에도 하시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간곡히 이야기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지난 총선 때 미래통합당의 위성 정당이었던 미래한국당을 찍지 않으셨는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굳이 여쭤보지도 않았다. 

 코로나 시대 은퇴자 2대가 한 집에 동거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아버지는 날씨 등 당신이 인터넷에서 접한 정보를 자주 화제로 삼는다. 그럴 때면 나는 영화 촬영팀에게 날씨를 전했다는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촬영팀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날씨를 잘 맞추는 추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 추장이 난색을 보였다. “라디오가 고장 났다”는 것이었다. 추장은 라디오로 들은 일기예보를 촬영팀에게 전했을 뿐이었다.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열린 광화문 촛불집회에 여러 번 나갔다. 대학생, 기자가 되려는 대졸 취준생들에게 강의할 때면 “역사의 현장에 알리바이란 없다”고 말한다. 조국 정국 당시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서초동 촛불집회에도 한 번 나갔다. 그러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입장을 떠나, 집회에서 ‘조국 수호’를 구호로 외칠 순 없었다. 조국 수호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국 정국에서 나는 페이스북에 좌파 선언을 했다. 말하자면 강북 좌파인 셈이다. 강북 태생인 나는 강북이 좋다. 쭉쭉 뻗은 강남의 대로보다 자연발생적인 강북의 삼청동 길에 더 끌린다. 조국 같은 강남좌파와 달리 계층적으로도 모순이 없다. 

 나는 1950년대 생으로, 86세대에 대해 나름의 부채감이 있다. 1979년 여름 10·26을 석 달여 앞두고 공군 사병으로 입대한 나는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80년 서울의 봄, 광주항쟁 등을 병영에서 겪었다. 아니 거의 깜깜이로 살았다. 초등학교 입학 후 군에 가기까지 나에게 역대 대통령은 박정희 단 한 사람이었다. 

 조국 사태, 민주당 출신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추행 사건, 정의기억연대와 관련한 윤미향 민주당 의원의 행적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 나라 진보 세력이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극단적 선택. 

 86세대가 대표하는 진보 세력은 더 이상 도덕적 우위에 있지 않다. 사실 기득권 세력이 되면 기득권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들 수밖에 없다. 인지상정이다. 보수주의자가 그렇듯이 진보주의자에겐 오직 진보적 의제가 있을 뿐이다. 박원순 시장의 자살은 이런 생각을 더 굳히게 만들었다.   

 지난 봄 내가 출강하는 잡지협회 산하 한국잡지교육원 출신 제자가 교육원으로 날 찾아왔다. 자동차 전문지 <탑기어>의 편집장으로 있는 제자는 회사 유튜브용으로 스승의 날 편을 찍고 싶어 했다. 그는 교육원에 다니던 시절 “컨버터블이 로망”이라고 한 나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고 말했다.  

 오래 전 프랑크푸르트 모터 쇼에 취재차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전시장에 세워 놓은 컨버터블마다 운전석에 앉아 동행한 후배에게 사진을 찍게 했다. 귀국 후 나는 두 아이에게 농반진반으로 나중에 선물로 아빠에게 컨버터블을 사 달라고 말했다. 

 제자가 운전하는 빨간 페라리에 앉아 차 지붕을 열어젖히고 우리는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사제 간의 세대 간 대화. 나는 나를 포함해 이른바 산업화 세대가 저마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의 압축 성장을 자기 공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수긍한다. 시니어들이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나가 ‘박근혜 석방’을 외치는 건 어쩌면 탄핵으로 자기 세대가 송두리째 부정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범한 스펙을 쌓아 평범한 직장인 되는 게 꿈인 세상을 만든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세대 차원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미 선진국을 따라잡는 캐치업이 당면 과제이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캐치업을 잘해 패스트 팔로우어가 됐다. 코로나19 사태로 우리 국민이 얻은 교훈은 평범한 시민들의 비범한 행동 즉 사회적 연대가 이른바 K 방역이라는 괄목할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이 나라 젊은이들은 역사상 가장 스펙이 뛰어난 세대이다. 이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애프터 코로나 시대 다수의 나라가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기를 대망한다. 뉴노멀 시대의 희망인 이 땅의 젊은 세대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꿈꾼 ‘오래된 미래’를 현실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도록 기성세대가 자리를 내줘야 한다. 그러자면 정치권을 압박하고, 나부터 투표를 제대로 해야 한다. 

 현실성 1도 없는 가정이지만, 지난 총선 때 여야를 떠나 위성 정당들에 유권자들이 표를 주지 않았다면 장담컨대 우리 정치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더 이상 정치 자영업자들의 볼모가 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21대 총선으로 비로소 ‘탄핵의 강’은 건넜지만, 180석 거여의 오만으로 개혁 정부 재집권의 꿈이 멀어질는지도 모른다. 악몽의 귀환.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분노한 시민들이 17대 총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표를 몰아줬지만 결국 추락하고 만 것이 불과 16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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