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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Aug 10. 2020

이등병에게 거수경례한 4성 장군

선한 영향력이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4성 장군은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느닷없이 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당황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의 당번병이었다. 입대한 지 반년도 안 된 ‘마이갈이 일병’ 이 일병. 그는 14대 공군참모총장 윤자중 대장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80회 출격한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다. 

 1979년 가을의 일이다. 그날은 서울 대방동 공군본부에서 전 공군의 주임상사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상사 계급장에 별을 단 주임상사는 해당 부대의 전 사병·하사관(부사관) 중 최상급자로 ‘사병 총장’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날 회의를 마친 후 윤 총장은 공군본부 청사 옥탑에 있는 장군식당에서 열린 회의 참석자 회식에서 이들에게 양주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당시 두 명의 당번병 중 하급자였던 나의 소임 가운데 하나는 도어맨이었다. 공군본부 청사 2층엔 참모총장실 및 비서실, 참모차장실, 참모부장들의 집무실 외에 장군 다실과 장군 이발소가 있었다. 일정이 빡빡하지 않은 날 총장은 수시로 다실이나 이발소를 찾았다. 그가 다실에 가면 나는 복도에 나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안쪽에서만 열 수 있는 총장 집무실 프라이비트 도어를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간혹 한 시간 가까이 하염없이 복도에 서 있을 때도 있었다. 전군에서 가장 졸병이었기에 복도에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게 나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전화 받기, 찻잔 나르기 등 총장 부관실에서 다른 잡무를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시간만큼은 총장 수석부관(최 중령), 전속부관(김 대위), 선임자였던 임 상병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총장실 근무를 막 시작했을 땐 훈련병 티를 채 벗지 못해 수시로 큰소리로 대답했고, 그 바람에 목소리의 볼륨을 낮추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었다.  

 총장실 앞 복도는 영관 이상의 장교만 통행할 수 있어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오죽하면 총장 전속부관이었던 김 대위가 부임하던 날 비서실 신 병장이 신임 전속부관인 줄 모르고 통행을 제지했을까? 

 복도에 서 있는 시간이 한 시간이 가까이 돼 가면 나는 긴장이 풀려 한눈을 팔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든지 딴 짓을 하기도 했다. 한참 만에 다실을 나선 총장은 코너를 돈 후 멀찍이 서 있는 나를 흘끗 보곤 했다. 그러다 내가 애먼 데를 보고 있으면 헛기침을 했다. 들어가 문을 열라는 시그널이었다. 그럼 나는 기겁을 해 집무실로 뛰어들어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몇 달 전 나는 대전의 신병훈련소에서 윤 총장을 처음 봤다. 대학을 마치고 장교로 입대한 공군사관후보생들의 임관식 날이었다. 임관식 전날 저녁 조교는 우리에게 정약복을 나눠준 후 이병 계급장을 달게 했다. 다음 날 훈련병 신분에 정약복으로 갈아입은 후 우리는 연병장에 모였다. 임관하는 장교가 많지 않아 다소 썰렁한 임관식장에서 ‘인간 병풍’처럼 배경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부여 받은 유일한 미션은 임관식 도중에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날 임관하는 장교 중에 네 사람의 학과 2년 선배가 있었다. 훈련 중 그 형들과 연병장에서 마주칠 때가 더러 있었다. 피차 피교육자 신분이다 보니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손 한 번 흔드는 게 고작이었다. 

 임관식 후 윤 총장은 사병 식당을 순시했다. 식당 앞에 도열해 있다 바라본 그의 얼굴은 구릿빛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테니스를 즐기는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얼굴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자의 백선과 흑백의 콘트라스트를 이뤘다. 그날 저녁 공군사관학교 출신 소위였던 구대장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의 꿈이었을 참모총장의 위세에 대해 소개했다. 

 얼마 후 훈련을 마친 나는 공군본부 본부대에 배속됐다. 나의 전임자였던 김 병장이 본부대로 온 신병 중 나를 후임자로 낙점했다. 그를 따라 총장실에 올라간 나는 윤 총장의 당번병이 됐다.  

 주임상사 회의가 있던 그날 장군식당을 나선 윤 장군은 참모들과 계단을 통해 집무실 쪽으로 내려왔다.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뚫고 총장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The well trained soldier is the best weapon.”(잘 훈련된 병사는 최고의 병기이다)

 부관실 천장과 벽 사이 졸대에 새겨져 있던 경구였다. 때마침 퇴근 시간이었다. 그가 집무실로 들어오면 나는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현재 공군회관 자리에 있던 총장 공관으로 바로 퇴근하면 공관에 근무하는 당번병들에게 알리기 위해 딸딸이라 불리던 야전전화 손잡이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돌려 집무실 앞 복도에 서 있는 나를 흘끗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거수경례를 했다. 당황한 내 모습을 본 그가 껄껄 웃었다. 참모차장, 참모부장 등 주변의 참모들도 따라 웃었다.  

 그가 왜 자신의 도어맨이었던 당번병에게 경례를 했을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사병 총장’들과의 회의 후에 “잘 훈련된 병사야말로 최고의 병기”라고 참모들에게 얘기하다 때마침 눈에 띤 나에게 ‘병사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 아닐까 나름 추측해 본다. 일군의 총장으로서 병사들을 존중한다는 제스처였다고 할까? 폭력이 일상인 야만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그 시절은 낭만의 시대이기도 했다. 

 처음 참모총장실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총장이 구두를 신는데 수석부관이 쪼그리고 앉아 뒤꿈치에 맞춰 구두주걱을 밀어넣었다. 중령이면 육군에선 대대장 계급이다. 최 중령은 소위 때부터 윤 총장의 부관을 한 사람이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나는 그때 이렇게 자기 최면을 걸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만세 부르면(못하겠다고 두 손 들면) 내가 지는 거다.”

 스포츠머리를 한 최 중령은 처음 만났을 때 부관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있었다. 거울로 나를 흘끗 본 그가 한 첫 마디는 “돋보기(안경)를 썼어?”였다. 그는 3.5성 장군, 참모부총장 소리를 들을 만큼 호가호위했다. 

1979년 오산 공군 작전사령부를 순시 중인 윤자중 공군참모총장(맨 왼쪽). 그 옆은 그 해 일어난 신군부의 쿠데타 후 정치적 중립을 지켰고 그 일로 옷을 벗은 작전참모부장 김동호 소장이다.윤자중 총장은 한국 전쟁 당시 80회 출격한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다. 

 

 윤 총장은 전역과 동시에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의 5공화국 정권 교통부장관으로 입각했다. 두 사람은 5·16군사정변 후 꾸려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보안사령관 시절 전두환이 윤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온 일이 있다. 윤 총장은 당시 군 후배인 전두환을 하대했었다. 

 윤 총장이 영전하던 날 최 중령은 전화를 걸어와 총장실 안 침실에 있는 오디오 세트를 자기 차에 실으라고 지시했다. 잠깐 망설였지만 나는 그의 지프에 오디오를 실었다. 이 오디오는 총장이 외부인과 접견을 할 때 대화 내용을 녹음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임 이희근 총장은 취임 후 오디오 세트가 사라진 것을 알고 자신의 공사 동기이기도 했던 윤 총장에 대해 험담을 했다. 총장이 실어간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공사 출신 첫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윤 총장은 장관을 그만둔 후 1983년 옥고를 치렀다. 이른바 명성 사건에 연루돼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였다. 훗날 복권되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이병으로 강등됐다. 몇 년 전 4성 장군이었던 그에게서 거수경례를 받고 쩔쩔맸을 때의 나의 실제 계급이다. 세라비!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1997년 나는 우연히 윤 장군과 조우했다. 일제 강점기 최고의 서정시인이었던 백석과 운명적인 사랑을 한 조선 권번기생 출신의 김영한 할머니와 인터뷰하기 위해 이촌동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백석이 지어준 호가 자야였던 김영한은 당시 자신의 소유였던 서울의 3대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었다. 길상사로 바뀐 삼청동의 그 요정이다. 김영한이 인터뷰를 거절해 나는 그의 집 앞에서 ‘뻗치기’를 했다. 그날따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사람들이 계단으로 통행했다. 그런데 웬 노부부가 계단으로 내려왔다. 허리가 구부정해진 윤 총장과 그의 부인이었다. 운동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자신의 집에 가 차 한 잔 하자고 권했다. 나는 업무 중이라고 설명하고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윤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통화했다. 전두환의 장인이자 이순자의 아버지인 이규동 대한노인회장도 연루된 당시 명성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는 “인터뷰는 안 합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시 연락하겠다고 한 것이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그를 따라 교통부 장관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최 중령이 그 후로도 그에게 누가 됐을지 모른다는 심증이 있다. 그 오랜 인연은 어쩌면 악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돼 지금은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둘은 공생관계였는지도 모른다. 

 윤 장군의 참모총장 시절 공군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던 김동호 소장의 부관은 민간 출신으로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을 지낸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이다. 내년이면 고희를 맞는 윤은기 박사는 시테크의 창안자이자 30여 년 경력의 자타가 공인하는 명강사로, 방송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윤 박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지내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김동호 장군과 윤은기 박사는 비행단장과 부관으로 만났지만 사제지간 같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덕체를 겸비한 군인이었던 김 장군은 윤 장군과 달리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그 바람에 공군의 엘리트였지만 옷을 벗어야 했다. 훗날 그는 “중장, 대장 진급하고 전역 후 국회의원이 되는 것보다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철학과 인생관에 따라 군을 떠난 게 더 떳떳하다”고 털어 놓았다고 한다. 윤자중 총장은 훗날 김 장군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당신이 제일 부러워. 옆에 윤 박사가 있잖아.”  

 윤은기 박사에게서 인터뷰 때 들은 이야기다. 

 출강하는 한국잡지교육원에서 만나는 기자지망생들에게 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강조한다. 우리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때로는 제자가 스승을 가르쳐 ‘나도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름지기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러자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에서 주인공 잭 니콜슨은 단골 식당의 웨이트리스 헬렌 헌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냉소적인 성격에 강박증 증세가 있는 이 로맨스 소설 작가는 마침내 따뜻한 사람으로 바뀌었고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준 그녀와 로맨스를 시작한다.  

 만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한 영향력이란 타인에게 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좋은 사람 되는 건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타인의 범위를 사람들이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할 때 전 인류는 비로소 공동체가 될 것이다. 코로나19 시대 타인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공동체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어쩌면 인류가 이 지구적 위기를 잘 건널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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