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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Aug 11. 2020

'방탕중년단'으로 살아가기

인생 2막의 두 키워드 방종과 탕진 ... 요리 제외한 가사는 허드렛일 

오팔(OPAL) 세대. 보석 오팔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활기찬 2막 인생을 사는 5060 신노년층(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을 가리키는 조어이다. 시간이 있고 구매력도 갖춰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기에 새로운 소비층으로 부상 중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오팔 세대의 오팔은 58년 개띠의 오팔과 발음이 같다. 공교롭게 58년 개띠 또래이기도 하다. 트렌드 연구가인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올해 10대 트렌드로 오팔 세대(iridescent OPAL)를 꼽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팔색조 시니어랄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2020 세계경제 대전망에서 욜드(젊은 노인·Young Old)의 전성시대가 왔다고 선언했다. 이들 욜드의 선택이 앞으로 소비재, 서비스, 금융 시장을 뒤흔들 거라고 전망했다. 

 오팔 세대는 과거 같은 나이의 세대에 비해 재취업에 열정적이고 ‘나를 위한 소비’를 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한다. 또 소셜 미디어를 활발하게 활용한다. 중앙일보가 ‘반퇴 시대’란 말을 만들어 냈지만 오팔 세대가 재취업에 적극적인 건 노후 자금, 생활비 마련을 위해 완전한 은퇴를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3년 전 가을 나는 ‘관훈저널’의 ‘언론인도 반퇴시대’라는 기획에 참여해 기고를 한 일이 있다. 관훈저널은 중견 언론인들의 연구·친목 단체인 관훈클럽이 발행하는 언론전문 계간지이다. 나로서는 신문사 정년퇴직 후 4년 간 어떻게 살았는지 정리해 볼 기회였다. 

 그해 봄 나는 신문사 후배가 창업한 인터넷 매체에서 데스크 보는 일을 3개월 간 했다. 말이 데스크이지 신분은 장년 인턴이었다. 기자는 정규직, 데스크는 비정규직 인턴인 현실은 이 시대의 한 단면이다. 그 무렵 나는 모교에서 맡았던 한국언론진흥재단 초빙교수를 임기 만료로 그만뒀다. 후배가 제안한 페이는 공교롭게도 초빙교수 급여와 같았다. 신자인 나로서는 이 우연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장년 인턴을 하려 나는 경기도에 가서 꼬박 하루 동안 교육을 받았다. 내 책 세 권을 냈고 몇 년 째 4대 보험을 해결해 주던 출판사 사장에게는 이참에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4대 보험을 의무적으로 인턴을 하는 회사에서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2년간 선인세를 지급한 출판사였다. 

 당시 딸·아들 두 아이와의 카톡방에 나는 “아빠가 인턴을 하게 됐다”고 올렸다. 부국장 전문기자로 정년퇴직한 아빠가 인턴이라니, 아이들로서는 짠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한 헐리우드 영화 <인턴>을 봤을 것이다.  

 독립한 두 아이를 포함해 다섯 식구인 우리 집은 나를 기준으로 다섯 개의 가족 톡방이 있다. 다섯 식구 전원, 나의 아버지가 빠진 네 명 톡방에, 세 식구로 이뤄진 톡방이 총 네 개다. 우리 부부와 각각 아버지, 딸, 아들이 낀 세 톡방, 그리고 나와 아이들만의 톡방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최장 9개월은 할 수 있다던 장년 인턴 일은 그러나 3개월 만에 끝났다. 있는 곳에서 원격으로 데스크를 보고 1주일에 하루, 기자들 교육을 하기로 근로조건에 합의했었는데 장년 인턴이 알고 보니 풀타임 잡이었기 때문이다. 대표는 자신도 점검을 나온 관계자의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됐다고 했다.   

 퇴직 후 지난 7년 간 나는 생계형 비정규직으로 살았다. 주 수입은 원고료와 강의료이다. 이 두 사례금은 어디나 대체로 박하다. 도처에 이 두 비용을 지불하는 이른바 ‘갑’이 있지만, 정규직 시절과 달리 퇴직 후 내 사전에 절대 갑은 없다. 지난봄부터는 신문사 후배가 차린 홍보대행사에 고문으로 주 1회 출근한다. 더 이상 가입 대상자가 아닌 국민연금을 제외한 보험도 여기서 해결한다. 정년퇴직 후 나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7년 동안 실업급여를 신청한 일도 없다. 실업급여를 받는 것이 당당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공식 실업자’라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기자들은 퇴직 후 안전망이 전무하다시피하다. 한국기자협회가 오래 전 기자연금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불발했다. 인터뷰 기사를 기고하고 원고료를 받는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나의 카운터파트는 나더러 작가라고 부르지만 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기자이다. 프리랜서 기자. 

 나는 잡지협회 산하 한국잡지교육원, 언론진흥재단 미디어교육원 등에 출강하고 기업, 공공 기관 강의도 한다. 코로나19 탓에 중단됐지만, 국내 유일의 민간 교도소인 소망교도소에 신입 재소자들 대상으로 재능기부 강의도 하러 간다. 

 나의 인생 2막 포트폴리오엔 이렇듯 ‘돈이 되지 않는 일’이 포함돼 있다. 2년 간 내가 나온 고등학교 총동창회 계간지 및 뉴스레터 편집인을 맡았었고, 대학 학과 총동문회 집행부에 참여해 후배들과 윤상삼기자상, 윤상삼장학금, 윤상삼기념강좌(저널리즘의 지평)를 만들었다. 윤상삼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으로 재직 중 과로사했다. 영화 <1987>에서 이희준이 연기한 기자. 

 프리랜서란 사실상 1인 기업가다. 몇 년 전 인터뷰 차 만난 홍순성 1인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베이비부머에게 1인 기업가의 길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했다. 정년은 연장됐지만 아무래도 70까지 일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퇴직 기자들이 가야 할 길이다. 

 7년 전 퇴직을 앞두고 나는 회사 선배들에게 이메일로 퇴직 인사를 대신했다. 그때 세컨드 라이프를 인물 스토리텔러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사이트(행복한은퇴발전소)에 내가 인터뷰해 연재하는 ‘명사의 인생 2막’의 바이라인이 인물 스토리텔러이다. 

 통계청장·국제통화기금 상임이사를 지낸 오종남 SC제일은행 이사회 의장은 인생 2막 무대의 성공은 사람들이 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려면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 ‘나를 위해 손해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오 의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친구에게서 평생 나한테 밥 산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으면 언젠가 그 친구가 단 한 번에 그 빚을 갚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의 인생 2막 롤모델이기도 한 그의 말마따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비밀도 없다. 오 이사장과 인터뷰하기 몇 년 전 나는 모교 언론홍보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그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는 흔히 '낀 세대'로 통하는 오팔 세대를 '말초(末初)세대'라고 불렀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의 부양을 기대할 수 없는 첫 세대라는 의미였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그날 그는 조상들이 말하는 인생의 3대 실패 중 청년 출세, 중년 상처(喪妻)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지만 나이 들어 무일푼이 되는 노년 무전(無錢)이 인생 실패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주장했다. 준비되지 않은 노년은 축복이 아니라 악몽이라는 것이다.

 그가 꼽은 말초 세대 3대 바보도 인상적이었다. 손자. 손녀 봐주느라 스케줄 변경하는 사람,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고 용돈 타 쓰는 사람, 출가한 자식이 방문했을 때 자고 갈 방이 필요하다고 집 늘려 가는 사람. 말초세대가 빠질 수 있는 3대 착각이다. 두 아이가 독립한 후 나름 새삼 실감하는 노년에 필요한 지혜이다. 

 지난달 첫 국민연금을 받으면서 오 의장처럼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밥 사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최근엔 아내와 함께 춘천을 찾아 생일을 앞둔 처제 식구들에게 밥을 샀다. 식사 후엔 폭우로 방류 중인 소양댐에 올라 물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우리는 분위기 좋은 춘천의 찻집 신북커피로 자리를 옮겨 대학생인 처조카까지 다섯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기자 및 기자 지망생들에게 강의할 때 지속적으로 교류할 만한 취재원에게 밥을 사라고 말한다. 기자도 밥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라고 권한다. 박봉이라 비싼 밥은 못 산다고 한 마디 덧붙이더라도 확실하게 자신의 이름을 취재원에게 입력할 수 있다. 기자는 좀처럼 밥을 사지 않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언론계에 회자된 이야기가 있다. ‘밥값은 누가 낼까?’ 믿거나 말거나 기자와 형사, 세무서 직원 셋이서 밥을 먹었다. 대표적으로 자기가 먹은 밥값을 내지 않는 직종들이다. 밥값은 누가 냈을까? 정답은 식당 주인이다. 

 장마 기간 반짝 해가 났을 때 아내와 집에서 멀지 않은 물의 정원을 찾았다. 


 첫 국민연금을 받은 후 아내와 나는 딸·아들을 별내로 불러 아버지와 외식을 했다. 식사 후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주 가는 아울렛에 가 선물을 하나씩 샀다. 나는 딸이 고구마 껍데기 같다고 말리는 버건디 색 재킷을 장만했다. 첫 국민연금을, 요즘 애들 말로  이렇게 ‘탕진’하다시피 했다. 

 젊은 날부터 나는 맥주 마니아이다. 맥주의 첫 모금은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노래를 했다. 1979년 여름 공군 훈련병 시절 훈련소를 벗어나 처음 먹은(?) 음식도 맥주였다. 반면 소주는 40여 년을 마셨지만 여전히 첫 잔이 역하다. 소주의 도수가 낮아져 역함의 정도가 낮아졌을 뿐이다. 통풍이 생긴 것도 맥주 애호가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와인 레스토랑 글루뱅의 장홍 대표는 “주종을 와인으로 바꾸면 술자리의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장 대표는 유럽 통합 문제를 전공한 프랑스 박사로 나와 갑장이다. 유학 시절 이래 20여 년 간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유럽의 와이너리 3000여 곳을 투어한 이 와인 애호가는 나와의 인터뷰 때 “1주일에 한 번 부부가 와인 잔을 부딪치면 늦둥이가 생길 수도 있다”고 강변했다. 

“와인 잔은 가득 채우지 않아요. 자리가 무르익고 와인 병이 차츰 비어갈 때 그 빈 공간을 상상으로 채우게 되죠.” 

 맥주가 맞지 않는 아내의 제안으로 나는 요즘 아내와 와인 잔을 부딪친다. 목사의 딸인 아내는 남은 인생은 방종하는 삶을 살아보자고 한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보수적인 신앙, 엄숙주의적인 경건 또는 경건의 모양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희망사항이다. 

 나는 언젠가 두 식구가 되면 아내를 주방에서 ‘해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느지막이 별내 카페거리에 나가 브런치를 먹고 늦은 오후 가성비 높은 맛집을 검색해 저녁을 해결한 후 귀가해 와인 한 잔 하면, 요리도 설거지도 할 필요 없다. 사실 요리를 제외한 집안일은 힘들고 빛은 안 나는 허드렛일이다. 

 빨래는 오래 전부터 내 일이었고, 아내는 청소만 하면 된다. 신문사 시절 해외 출장을 가면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선물이 아니라 빨래 담당을 기다렸다. 지난 겨울 별내로 이사하면서 건조기를 장만해 빨래라고 해 봤자 세탁기, 건조기 순으로 돌린 후 개기만 하면 된다. 

 2015년 유엔은 평생 연령 기준을 대폭 높여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18~65세를 청년, 66~79세를 중년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노년은 80~99세, 100세 이상을 장수노인으로 분류했다. 아내와 나는 ‘방탕중년단’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BTS의 패러디. 방종과 탕진을 키워드로 하는, 우기면 중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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