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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Aug 13. 2020

아빠는 흑인과의 결혼은 별로야

별 수 없는 인종주의자 ...  학교와 언론이 인종.피부색 편견 막아야 

 <초대 받지 않은 손님>. 1967년 만들어진 이 할리우드 영화는 흑인과 백인 간의 결혼을 다뤘다. 원제가 ‘저녁식사에 누가 올지 맞혀 보라’(Guess who's coming to dinner)이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 탄 명배우 스펜서 트레이시가 연기한 주인공은 외동딸이 데려온 의사 사윗감을 보고 난감해 한다. 흠잡을 데 없는 남자이지만 흑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결혼을 막고 싶은 심정이다. 자유롭게 자라 주관이 뚜렷한 딸은 그런 줄도 모르고 즉흥적으로 저녁식사에 손님을 초대한다. 누가 올지 알아맞혔는가? 바로 예비 시부모들이다. 흑인인 이들 역시 백인 며느리가 탐탁지 않다. 양가 부모 사이에 이런저런 마찰이 빚어지고 딸은 부모 허락 없이 결혼을 하려 든다. 주인공은 결국 결혼은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침내 양가 사람들은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시작한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엄마 역의 캐서린 헵번은 아카데미상을 네 번이나 받았다. 역대 최다 수상. 당시 스펜서 트레이시와는 불륜이었지만 파트너 사이였다. 이 스크린의 여왕은 트레이시의 유작인 이 영화를 끝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를 빼다박은 딸 역의 캐서린 호튼은 헵번 여동생의 딸이다. 

 나는 20대인 미혼의 딸·아들이 어렸을 때 “아빠는 흑인과의 결혼은 별로”라고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흘렸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라고 해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내 아이들이 흑인과 맺어질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전무해 보이지만 그 시절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딸의 고등학교 친구가 흑인과 결혼했으니 전적으로 가능성을 배제할 일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적령기가 됐을 땐 어쩌면, 결혼을 승낙해 달라는 게 아니라 어느 날 지나는 길에 들러 “우리 결혼했어요”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엉거주춤 초면의 흑인 사위를 끌어안고 "축하하네"라고 해야 하나? 헐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과의 결혼은 찬성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흑인과 사돈 맺기는 말하자면 나로서는 마지노선인 셈이다. 민족 간의 친밀도를 측정하는 보가더스의 사회적 거리척도에서 가장 가까운 단계는 ‘결혼해 인척관계를 맺는것’이다. 나는 흑인들과는 그 다음 단계인 ‘친구관계를 맺는 것’까지만 원한다.  

 인종 문제를 떠올리게 된 건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의 졸업 퍼포먼스 ‘관짝소년단’이 불러일으킨 논란 때문이다. 블랙페이스 즉 얼굴을 검게 칠하고 아프리카 가나의 상여꾼들이 운구 중에 춤추는 장면을 패러디한 관짝소년단 말고도 이들은 역시 ‘흑인 분장’을 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목줄을 채워 끌고 다니는 모습의 패러디 사진을 올렸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에서 리버풀 소속 선수 제라드가 미끄러져 넘어졌고(일명 ‘제라드의 굴욕’) 그 결과 상대팀 첼시 소속 흑인 선수 뎀바 바가 선제골을 넣었는데 이 장면을 희화화한다는 것이 사람 목에 목줄을 거는 데까지 나간 거다.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킨 의정부고생들의 졸업 퍼포먼스 ‘관짝소년단’. 출처 : 의정부고 학생자치회 페이스북 페이지.

 이 두 번째 패러디 사진에 대해 의정부고 학생자치회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인종차별이나 인간 존엄성 훼손의 의도가 없었다”는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당 사진을 삭제했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의 비판을 떠나 나는 이 학생들에게 무슨 나쁜 의도가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샘 오취리처럼 불쾌감을 느낄 흑인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검정 페이스 페인팅을 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이 소동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민낯이 드러난 우리나라 미디어의 낮은 인종 인지 감수성과 클릭 장사라는 생각이다.  

 의정부고생들에게 흑인 비하의 의도가 없었어도 인종 차별일까?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패러디에 불쾌감을 느낀 오취리가 앞서 자신이 한 정당한 비판에 대해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 후 공주고생들이 온라인에 흑인 분장 사진을 올리고 샘 오취리의 이름을 태그한 것을 보면 학교가 이런 행동을 다시 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Black Lives Matter" 

 나도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미국 경찰의 잔인한 행동을 규탄한다. 흑인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백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검은 것이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본래 검정색을 좋아하지도 않고, 검정 옷도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흑인 분장을 하는 심리의 저변에 일찍이 박노자 교수가 개념화한 한국인의 저열한 ‘GNP 인종주의’(GDP 인종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사회비평가 박권일)는 지적에 나는 수긍한다. GNP가 높은 선진국 출신 백인 앞에선 주눅 들고 상대적으로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 아시아계나 흑인들은 홀대하는 경향이 한국인은 유독 심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거리에서 한국 여성이 흑인 연인과 같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왠지 심기가 불편해 진다.  

 주한영국대사관 등 영연방 국가 정부에서 30년 간 일한 박영숙 (사)유엔미래포럼 한국대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도인 등 아시아인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피부가 검으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인터뷰 때 말했다. 당사자의 지위와 관계없이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진하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 출신일 거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과 방송 등 언론이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한국인의 이런 오만과 편견을 교정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초등학교도 가기 전 미취학 아동 시절의 일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 오류동의 단독주택에 살았다. 어느 날 집에 혼자 있는데 누군가 무슨 물건으로 대문을 쾅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대문이 활짝 열렸고 다리가 불편한 한 상이군인이 들어섰다. 그가 자신의 목발로 대문을 친 것이었다. 물건을 팔러 온 그는 너무도 당당했다. 겁에 질린 나는 그날 이후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이 생겼다. 어른이 되어 완력으로 뒤지지 않게 된 후에도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을 보면 지레 위축된다.  

 오래 전 강남의 드레스샵으로 고 앙드레김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다. 인터뷰 도중 한 소녀가 그를 찾아왔다. 앙드레김이 피아노 치는 아이라고 소녀를 소개했다. 자신이 연주복을 맞춰 줬는데 가봉을 하러 왔다고 말했다. 소녀와 무심히 악수를 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그때까지 나로서는 존재를 몰랐던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였다. 지금도 그 날 침착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공부하는 통합교육에 찬성한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완화하려면 학습에 큰 문제가 없는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함께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른 인종, 다른 민족의 사람과도 평소에 교류하고 부딪혀야 편견이 줄어든다. 5공 말 경제부총리를 지낸 고 정인용은 “우리나라는 세계화를, 아시아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시아 속의 한국인이라는 뜻으로 코라시안이란 조어를 만들어 썼다. 나는 중앙일보에 그의 회고록을 연재한 후 공저로 책을 냈다. 

 사실 한국인이 단일 민족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농촌 학교 교실의 절반 가까이가 다문화 가정 출신인 요즘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에도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단일 민족은 아니었다. 

 우리 속 GNP 인종주의는 후진국 출신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강화해 또 하나의 소수자 차별과 배제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 소셜 미디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좋아요’를 받은 샘 오취리에 대한 이런 비난이 그 방증이다.  

“다른 나라 가면 공장에서 돈이나 벌랑가 모르지만 한국에서 좀 뜨게 해주니까 자기 본분도 모르고 관심 받는다고 우쭐해져서 어디서 선생질을 하려고 들어. 가나에서나 어깨 우쭐할 것이지 어디 한국에서 가르치려고 들어.”

 지금처럼 인종 차별 문제를 방치했다가가는 다문화 가정 출신이 이 나라에서 2등 시민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탈북자들도 마찬가지다. 남북통일은 요원하지만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통일이 돼도 사실상 두 국민의 동거 체제가 될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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