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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Sep 14. 2020

18. 부양하고 부양 못 받는 낀 세대

부모의 굴곡진 가족사는 한 편의 소설 ... 가족은 유일한 대면 공동체

 8년 전 이맘때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향년 77세. 지병인 당뇨병을 오랫동안 앓으셨지만 관리를 잘해 비교적 건강하셨다. 장례를 치른 후 서울 근교 추모공원에서 나무를 골라 수목장을 지냈다. 두 나무가 만나 결이 통한 연리지목이다.

 어머니는 세 남매 중 장남인 나를 편애하셨다. 때로는 집착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누나와 남동생이 그 피해자였다. 아버지와도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시집 식구, 심지어 당신 피붙이들과도 원만치 못하셨다. 당신이 그렇게 일찍 떠나실 줄 알았다면 달라지셨을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나의 부모의 굴곡진 가족사는 소설이 무색하다. 어머니는 원가족 문제가 있었다. 칠남매의 장녀였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본 일이 없는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입시에 합격한 중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외할머니가 학교에 보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 권사였던 외할머니는 외향적이셨다. 어머니에게 집안 살림을 맡기고 심방을 다니셨다. 초등학교 시절 작성한 가정환경조사서에 어머니 학력을 아버지는 중졸이라고 적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중학교를 나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알파벳을 모르셨기 때문이다.

 ‘법적인 자녀’인 며느리·사위와의 관계는 어머니로서는 더욱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당신이 원했던 며느리 감이었던 나의 아내와도 잘 지내시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어느 편도 들을 수 없었다. 아내의 역성을 들지도 않았지만 어머니를 나무라기도 했다. 어려서 체벌을 많이 한 어머니지만 중학교 때 내가 어머니 팔목을 잡은 후로 나한테는 매를 드시지 못했다.

 남편도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 아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가 디스크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 때였다. 청천벽력이었다. 나는 내가 이룬 작은 나의 가정을 지켜야 했다. 박봉에 집 장만을 하려 일시적으로 본가에 얹혀살던 나와 아내는 분가를 했다. 결혼을 하면서 돌아간 모교회도 다시 떠났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머니는 아내에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 아내는 1년 가까이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제대로 화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채로는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생전의 어머니는 백일도 안 돼 떠난 나의 첫 아이를 봐줄 수 없다고 하셨다. 맞벌이하던 아내가 극동방송 아나운서로 근무하던 시절이다. 그 바람에 목사 사모인 장모가 아이를 맡으셔야 했다. 아이를 가슴에 묻은 아내에게 어머니는 모진 말을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 후 본가에 얹혀살던 시절엔 딸아이를 보실 수 없다고 해 옆 단지 사시는 어느 권사님에게 나와 아내, 아버지가 출근길에 번갈아 가며 아이를 맡겼다. 아이를 떼어놓고 돌아설 때 아파트가 떠나가게 울던 아이의 울음소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어머니는 환갑 전, 지금의 아내 또래였다.

 혼자 되신 아버지는 당시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셨다. 독거를 바라신 아버지가 지척에 사셨지만 나는 잘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러다 6년여 전 병이 나셨다. 어찌된 일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셨다. 병원 몇 곳을 찾은 끝에 병명을 알아냈다. 외출했다 넘어져 머리를 부딪친 게 원인인 뇌경막하혈종이었다. 두개골 안쪽에 고인 피를 뽑아내는 시술을 받으신 후 몇 달 걸려 회복이 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다.

“살림을 합치는 거 말고는 아버지도, 저도 대안이 없습니다.”

 그 후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 이제 제가 가장입니다.”

 이렇게 합치면서 우리 집은 조손이 함께 사는 3대 가정이 됐다. 방이 부족해 넓은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지금 사는 별내의 분양 받은 집으로 옮기기 전 전셋집 주인이 집을 파는 바람에 팔자에 없는 종로구민 생활을 1년여 했다. 그 얼마 전 취업한 딸의 출퇴근 편의를 고려한 결정이었는데, 얼마 후 딸이 독립했다. 올 들어 ROTC를 한 아들이 임관해 이제 세 식구가 산다.    

 아버지는 1935년생,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여섯이시다. 한국전쟁 도중 열여섯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하셨다. 참전용사인 만큼 반공 보수이다. 한때 5·16쿠데타 주도세력이 만든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을 지내셨다. 아버지와 합치면서 두 집에서 보던 중앙일보를 일시적으로 끊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페이스북에 “종이 신문을 일주일 못 봤는데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고 짧은 잡문을 올렸다. 그러자 신문사 후배들이 무슨 신문을 보느냐고 댓글을 달았다. 나는 정년퇴직 후에도 관성적으로 중앙일보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자식이 다니던 중앙일보를 구독했다. 경향신문에 있는 후배가 원한다면 “광속으로 배달을 시키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래서 보기 시작한 경향신문을 계속 본다. 아버지한테 신문을 바꾸겠다고 했을 때 “무슨 신문을 보려 하느냐”고 물으셨다. 며칠 경향신문을 보시더니 어느 날 “신문을 그렇게 만들어야 팔리느냐”고 한마디 하셨다. 신문의 논조가 불편하셨던 것이다.  

 올해 대학원에 진학해 상담을 전공하는 아내가 아버지의 가계도를 그린 적이 있다. 아버지는 유년기에 두 형을 잃었다. 이복동생을 포함해 두 동생과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족보엔 세 할머니 이름이 올라 있다. 이런 가족사가 아버지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의 부모는 말하자면 모두 이른바 결손가정 출신이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뒷줄 왼쪽)는 한집에 살던 손녀(앞줄 왼쪽)를 못 봐주시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동갑인 아버지는 스무 살에 결혼해 스물다섯에 세 남매를 둔 가장이 됐다. 뒤늦게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주경야독 했지만 한 학기를 남겨두고 생활고로 중퇴했다. 아버지는 몇몇 직장을 거친 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사무총장을 지내셨다. 10년 만에 상근자로서는 최고위직에 올랐을 때 이를 시샘한 내부자들이 대졸로 적은 아버지의 학력을 문제 삼았다. 회장은 이 사실에 개의치 않았지만 환멸을 느낀 아버지가 스스로 그만뒀다. 두산동아 백과사전연구소장을 끝으로 아버지는 만 62세에 은퇴하셨다. 7년 전 정년퇴직한 나의 지금 나이다. 마흔둘에 내가 성장한 교회의 장로가 되셨고, 15년째 그 교회 원로장로로 계시다. 시술 직후 나는 휠체어에 앉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격주로 그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지금은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교회에 나가신다. 코로나19로 요즘은 못 가시지만. 우리 부부가 거실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신다. 미증유의 역병 덕에 우리 세 식구는 요즘 함께 예배를 드린다.      

 우리 집은 아침에 커피와 빵을 먹는다. 식빵을 토스터로 굽는다. 계란도 삶고 사과나 토마토를 곁들인다.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아침식사 준비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도 같이하지 않는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건 불합리했다. 지금 아침식사 준비는 나의 일이다. 계란 삶을 땐 전용 기구를 사용한다. 기구로 하는 계란 반숙은 삶는 시간과 뚜껑을 언제 여느냐가 관건이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 아버지와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지만 아내를 위해 커피를 내린다.

 아버지와 나는 아침 식탁에서 정치·신앙을 포함해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아니 나눴었다. 단적으로 계층 투표를 한다면 아버지가 보수 야당을 찍으실 이유가 없다고 말씀 드렸다. 21대 총선 땐 정당 투표는 어느 위성 정당에도 하시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권했다. 정치 성향, 신앙 노선이 다르다 보니 그 후로도 우리는 자주 격한 대화를 했다. 얼마 전부터는 정치·신앙 이야기를 피한다. 굳이 공동 화제를 찾으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날씨, 산책 등이 주로 식탁 화제다.  

 한때 기사 딸린 회사 차를 타신 아버지는 투병 중 교회에 모시고 다닐 때 뒷자리에 앉아 차선을 바꾸라는 둥 지시를 하셨다. 당신이 휠체어 타시던 시절이다. 나는 “저보다 운전을 잘 하시느냐”고 받아쳤다.

 나는 이른바 '낀 세대'이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의 부양을 기대할 수 없는 첫 세대. 누군가는 '말초(末初)세대'라고 부른다.

 부자 간이라 하더라도, 한국전쟁 참전 세대와 전후 세대가 동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구순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나에게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도 인정 욕구는 좀처럼 내려놓기 힘들다. 달려갈 길을 마쳐가는, 늙어 가시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수시로 느낀다. 나는 아버지 나이까지 살기나 할까? 백세 시대라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코로나19 시대 가족은 거의 유일한 대면 공동체이다. 은퇴한 부자가 삼시 세 끼 얼굴을 맞대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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