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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Sep 12. 2020

17. 그때 '노'라고 말했어야 했다

거절 당할 용기가 부족했던 날들 ... 간절하지 않았던 가련한 나의 꿈들

 대학 시절 나는 연극을 했다. 신문방송학과 차원의 학과 단위 연극이었다. 1학년 땐 스태프를 했고. 2학년 땐 무대에 섰다. 3학년 때 연출을 맡기로 했었는데 2학년 마친 후 군대에 가느라 휴학을 했다. 그 바람에 친구가 그해 연극 연출을 했다. 최근 인터뷰한 ‘삼시세끼’의 나영석 PD가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극회 출신이라고 했는데, 이 극회가 신문방송학과 연극반의 후신이다. 

 가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우리는 여름 방학 내내 학교에서 만나 연극 연습을 했다.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는 길에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 연극과는 무관한 그 노래를 우리는 주제가라고 명명했다. 1학년 때 백양로에 울려 퍼진 주제가는 이수만의 행복이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 눈감으며 외면하고

지나간 날들을 가난이라 여기며 

행복을 그리며 오늘도 보낸다.

비 적신 꽃잎에 깨끗한 기억마저

휘파람 불며 하늘로 날리면

행복은 멀리 파도를 넘는다.'


 오래 전 이수만과의 인터뷰 때 그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당시 연극을 같이한 친구가 훗날 유명 탤런트와 약혼하던 날 엉겁결에 다른 한 친구와 이 노래를 약혼 축가로 불렀다.    

 촌극 수준이었지만, 조해일의 ‘건강진단’을 서클과 교회에서 한 차례씩 무대에 올렸을 땐 기획 및 연출을 맡았다. 캐스팅을 할 때면 “연극 속의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안의 연극을 사랑하라”는 말을 인용했다. 메소드 연기의 아버지로 통하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한 말로 기억한다. 연출가이자 배우였던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기억하라. 작은 배역이란 없다, 작은 배우가 있을 뿐.”

 1982년 가을 나는 공군 사병으로 복무한 후 무려 3년 반 만에 복학했다. 군대 간 사이 중단된 학과 연극을 되살리고 싶었다. 연출을 맡았다. 1,2학년 현역 후배들과 의기 투합해 상연작으로 이문열의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를 골랐다. 후배의 어머니가 연극 대본으로 각색을 했다. 후배들과 연극 연습을 시작했다. 어느 날 학과장이 연습 장소였던 강의실에 들이닥쳤다. 연극 연습조차 집회 허가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는 허가를 받지 않은 만큼 이 연습은 엄연한 불법집회라며 나에게 말했다. 

“이군, 이 건으로 내가 자네를 징계할 수도 있어.” 

 그날 그 교수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연극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학과장으로서 나름의 입장이 있었겠지만 진정 연극을 사랑한다면 그런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한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어쨌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연극을 해 보겠다고 모인 제자들 아닌가? 

 절차상의 문제는 있었다. 집회 허가를 받기 전이었지만, 학과장은 한동안 중단됐던 연극을 재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 집회 허가를 받기 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학과 출신이었던 학장으로부터 “신방과 연극 한다면서요?” 소리를 듣고서 돌연 절차 문제를 따진 것이다. 상연작은 문제를 삼을 만한 사회극도 아니었다.   

 나의 결정으로 연극 연습은 중단됐다. 그 후 이래저래 동력이 떨어져 결국 상연의 꿈을 접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불찰이었다. 어쩌면 꿈이 간절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일은 내 삶을 통틀어 가장 후회스러운 사건이다. 집회 허가라는 절차를 떠나 그때 학과장 교수에게 나는 당당히 ‘노’라고 말했어야 했다. 늦게나마 소정의 절차는 밟겠지만 연극 연습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어야 했다.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세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거절당할 용기, 자신의 상처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 남의 장점에 직면할 용기다. 인간으로서의 성숙도를 떠나 이런 용기를 내는 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리라.   

 나는 군 입대 전 여학생과 미팅을 하면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았다. 한번은 대학 때 서클을 같이한 여자 동기가 나와 미팅을 한 여학생이 자기 친구라며 왜 애프터를 신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애프터를 신청하지 않은 건 무엇보다 상대방에게서 거절당할 게 두려워서였다. 1학년 연고전 때 다른 학교 여학생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상처로 남은 탓이었다. 우연히 연고전에서 마주친 그 여학생은 나보다 고학년으로 보이는 고대생과 같이 있었다.  

 대학 시절 연극을 한 후로 나는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다. 복학 후 단짝이던 친구와 영화론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연극 공연을 막았던 학과장이 담당한 이 과목은 시험을 보는 대신 영화평을 리포트로 제출했다.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던 차 수업 시간에 공짜 영화표가 돌았다. 감독 겸업을 선언한 고 하길종 감독의 동생 하명중의 감독 데뷔작 ‘X’ 초대권이었다. 고 하길종은 UCLA에서 영화를 전공한 첫 유학파 감독으로 ‘바보들의 행진’ 등의 작품을 남겼다.  

 하명중은 영화 X로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조해일 원작의 영화는 그러나 난해했다. 단짝 친구가 하 감독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걸었다. 영화론을 듣는 학생이라는 말이 배우 출신의 이 신예 감독에겐 영화학도쯤으로 들렸을 것이다. 우리는 상영관이던 서울극장으로 찾아갔다. 하 감독이 주연 남녀배우인 하재영과 이미숙을 좌우에 대동하고 나타났다. 우리는 서울극장 뒷골목 대포집에 마주앉았다. 대스타이자 여전히 현역인 이미숙에게 “연기가 좀 경직돼 보였다”는 소리를 한 기억이 난다. 훗날 최인호 원작의 ‘겨울나그네’에 나온 그 이미숙. 여배우 앞에서 영화와 연기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었다. 

 영화감독이 되는 경로로 나는 드라마 PD를 염두에 뒀다. 부모들은 PD라는 직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복학 후 학점을 만회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을 때였다. 공부도 하다 보니 할 만했다. 대학 선생이나 할까 하는 생각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논문 발표장에서 지도교수와 부딪친 후 나는 신문사에 입사했다. 2016년 나는 모교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 초빙교수를 지냈다. 교수의 꿈을 접은 지 30년 만에 돌고 돌아 모교 강단에 선 것이다. 돌이켜보면, 취직을 한 건 교수에 대한 꿈이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막상 취업을 하고 보니 일은 학교 공부와 달랐다. 아니 일머리는 공부머리와는 달랐다. 일머리는 곧 문제 해결 능력이고, 일을 잘하려면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취재의 일선에서 거절을 당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렇게 연타를 맞더라도 견디고 꿋꿋이 버텨야 했다. 걸출한 동료·선후배를 비롯해 주변의 일 잘하는 사람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는 것도 중요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 졌다. 더욱이 지금은 집단지성의 시대이다.   

 취재는 영업과 흡사하다. 비교적 대접 받는 영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영업에 관한 경구들을 눈여겨본다. “영업이란 상대방이 거절하는 순간 시작된다”는 영업에 관한 격언이 있다. 이 말에 취재를 대입하면 이렇다. 

“취재란 취재원에게서 취재를 거절당한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나는 취재원에게서 숱하게 취재를 거부당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맷집이 생겼다. 밥 우드워드와 함께 워터게이트를 특종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의 칼 번스타인은 “열 명 중 아홉 명에게서 인터뷰를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워터게이트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이었던 벤저민 브래들리는 이들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두 사람은 같은 질문을 50명에게 서슴없이 던진다. 누군가 어떤 정보를 쥐고도 내 놓지 않는다면 기자로서 같은 질문을 50번이라도 되풀이해 던질 사람들이다.”

 결국 우리 삶을 옥죄는 건 각종 욕구와 두려움이다. 그 중에서도 인정 욕구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다. 7년째 함께 사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의 아버지는 아들을 상대로 ‘인정투쟁’을 벌인다. 보수적인 신앙의 소유자이면서도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신성모독에 “하나님도 돈에 약하다”며 하나님을 맘몬 취급하는 전광훈 목사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한다. 아버지가 속한 보수 개신교 집단으로부터 비난 받고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인 듯싶다.      

마더 테레사는 신의 부르심을 받은 후 검은 수녀복을 벗고 가난하고 미천한 인도 여인들의 옷 흰색 사리를 입었다.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칭찬 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명예로워지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신뢰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인기를 누리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굴욕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멸시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중상모략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잊히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오해 받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조롱당하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배신당하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마더 테레사의 ‘나의 기도’)  

   

 ‘나의 기도’에서 테레사 수녀가 빠져들지 않도록 해달라고 신에게 구한 것도 바로 욕구와 두려움이다. 마더 테레사의 간구는 어느 날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와 나의 기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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