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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Sep 06. 2020

16. 남자들이여, 배우자에게 배우자

50대에 홀시아버지 모시는 아내 ... 인생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

 코파 대 비코파. 오래 전 코골이를 소재로 삼은 TV 단막 드라마가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단체로 MT를 떠났다. 묵을 방이 두 개뿐이었다. 코를 골지 않는 사람들의 안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코를 고는 사람들과 코를 골지 않는 사람들로 나눠 방을 배정했다. 열심히 놀고 곯아떨어진 그날 밤, 코를 골지 않는다고 스스로 주장한 사람들이 잠든 비코파 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진동을 한다. 코를 골지 않는 사람들이 배정 받은 비코파 방에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며 비코파들이 하나둘 빠져나온다. 나는 절대 코를 골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비코파라고 나이가 들어도 코를 골지 않을 거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잠잘 때 코를 심하게 곤다. 수면무호흡증이 걱정될 정도다. 젊어서부터 그랬다. 바로 말고 모로 누우면 좀 덜 곤다. 모로 누울 땐 되도록 아내와 마주보려 한다. 부부가 등 돌리고 누우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옆에 누운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누가 세계일주를 하나. 상대가 등을 돌릴 때 엄습하는 배우자와 단절된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체크 6.’ 전투기 조종사는 공중전이 벌어졌을 때 사각지대인 6시 방향 즉 후방을 잘 체크해야 한다. 적기에 꼬리를 물리면 격추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6시는 곧 죽음이 닥치는 방향 ‘데드 6’이기도 하다. 액션 영화에서 같은 편끼리 등을 맞대고 상대편과 싸우는 것도 6시 방향을 경계해서다. 꿈에 사투를 벌일 수도 있는 잠에 빠져들면서 등을 돌린다면 배우자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등을 맞대고 눈 앞의 적과 싸워 배우자를 보호하리라. 인생은 해석이다.       

 나는 개신교 모태 신앙이다.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그래서 모태 신앙이라고 얘기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가장 신앙이 좋았다고도 한다. 나는 신자로서 기도를 게을리 하고, 방언의 은사도 못 받았다. 어려서는 식사 기도도 밖에선 하지 않았다. 군대 가면서 밖에서도 식기도를 했다. 군대 가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데 나는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었다. 신자로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의 제자라는 두 정체성 중 후자에 경사돼 있다.  

 팔순의 아버지와 함께 살기 몇 년 전 우리 가족은 교회를 옮겼다. 해외의 한국 교포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는 커뮤니티이다. 목사의 딸인 아내가 왜 꼭 옮겨야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마지막 관문이었다. 

“나는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아.”   

 아내는 이 얘기를 듣고 이른바 수평이동에 동의해 주었다. 요즘 새 신자들은 대부분 수평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는 이제 교회의 목표는 성장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라고 말한다. 100% 동의한다. 

 우리 부부는 소정의 새 신자 교육을 받았다. 교회의 방침에 따라 예배에만 집중했고 오랫동안 했던 찬양대도 반 년 간 쉬었다. 우리 부부는 교회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재정교실을 이수했고, 아내는 상담 아카데미 등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해 열공했다. 심리학을 전공한 아내는 공부를 지속하려 올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상담을 전공한다. 50대 후반에 늦깎이 연구자가 된 것이다.  

 나는 내가 성장한 교회를 비롯해 지금까지 다섯 교회에 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나온 모교에 자부심을 느끼듯이, 교회를 옮긴 후 처음으로 내가 섬기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내가 다니는 높은뜻정의교회는 정의여고 강당에서 예배 드린다. 높은뜻 정신은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행복한 교회’라는 모토에 압축적으로 담겼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고 성경적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힘쓴다.  

 우리 부부는 해마다 개설되는 ‘높은뜻 친밀한 부부학교’도 다녔다. 이수 후엔 2년 간 스태프로 봉사했다. 기독교적 결혼관에 따르면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고 배우자에게 각각 남편과 아내로 완성되어가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것과 같은 언약이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결혼 예비학교’, ‘좋은 부모학교’도 연다. 올해 좋은 부모학교는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나는 오늘날 개신교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교회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생겼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이상형, 부자관은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네 번 결혼을 주례했다. 둘은 회사 후배였고, 나머지 둘은 각각 대학에서 가르친 제자와 친구 아들이었다. 나는 주례를 부탁 받으면 신랑·신부에게 좀처럼 극복이 안 되는 자신의 약점을 적게 한다. 그 약점을 식장에서 스크린에 띄운 후 낭독하게 한 적도 있다. 잘 고쳐지지 않는다고 미리 예비 배우자에게 스스로 고백한 단점이 이혼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또 인간관계의 기본인 배려와 존중은 누구보다도 배우자에게 적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결혼식장 주례에게서 귀동냥한 얘기지만, 혼인 서약은 나의 배우자에게서 ‘평생 잘 배우자’는 다짐이라고 얘기한다. 요즘은 주례 없는 결혼식이 흔하지만, 결혼식 사회자가 심지어 주례마저 “성혼 선언문 낭독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난센스다. 주례는 성혼 선언의 주체이므로 “이제 성혼을 선언한다”고 말해 마땅하다. 주례가, 주례 없는 결혼식의 무주례와 경쟁하는 시대다.   

 나는 근 30년 전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 내가 성장한 교회에서 결혼했다. 장애인의 날을 일부러 고른 건 아니었다. 뒤늦게 장애인의 날인 줄 알았지만, 정서적 장애가 있어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내가 장애인의 날에 결혼한 건 나름 의미가 있다. 

 그 봄이 오기 전 겨울 대학로의 한 경양식집에서 블라인드로 처음 만난 날 우리는 9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석 달 후 나는 다른 경양식집에서 냅킨을 한 장 뽑아 몇 줄 휘갈겼다. “평생 아내로 섬기겠다”는 프로포즈였다. 아내는 직업적인 글쟁이를 만나 평생 행복한 편지를 받고 싶어 했지만 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편지 글이 익숙지 않다고 궁색한 핑계를 댔다. 짧은 연애 기간 우리는 만날 날보다 만난 횟수가 더 많았다. 하루에 두 번 만난 적도 있기 때문이다. 서른 번째 만난 날엔 장미 서른 송이를 뒷짐 지듯 들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처가가 있던 상계동과 내가 살던 자양동을 연결하는 동일로에, 좀 과장하면 포장을 다시 할 수 있을 만큼 택시비를 뿌렸을 때 우리는 결혼했다. 우리 결혼했어요. 아내가 다니던 극동방송국 동료·선후배들과 웨딩샤워도 했다. 방송국 동료들이 노래를 시켜 나는 양희은이 부른 번안곡 ‘일곱 송이 수선화’를 불렀다.       

“눈부신 아침햇살에 산과 들 눈뜰 때

그 맑은 시냇물 따라 내 마음도 흐르네.

가난한 이 마음을 당신께 드리리.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방송국 근처에 전세로 신혼집을 마련했다. 여러 번 이사를 했고 한때 본가에 얹혀 지내기도 했다. 이른바 시월드 어페어로, 또 아이들 문제로 우리는 많이 다퉜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면 폭우가 쏟아지는 격이었다. 

 둘째가 태어난 후 아내는 방송국을 그만뒀다. 오랜 경력단절 끝에 두 아이의 사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내는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한때 고3도 가르쳤고, 50대 후반이지만 여전히 과외를 한다. 과외선생의 정년은 몇 살일까?

 그 새 시월드의 여왕 같았던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 덕에 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를 마음에 새겼다. 그 후 당신이 원해 독거하시던 아버지가 병을 얻었다. 아버지의 투병으로 아내는 50대에 접어든 6년여 전 홀시아버지를 모시게 됐다. 자신의 인생 계획에 없던 일이다. 스스로 계획한 대로 풀리는 인생이 얼마나 될까? 

별내 우리 집 단지 안 연못가에서 어제 아내와 셀카를 찍었다. 찍고 보니 커플룩.   


 아버지와 합치면서 우리는 전세로 옮겼다. 그 덕에 내 생애에 가장 큰 50평대 집에 살아봤다. 지난 1월 우리는 5년여 만에 다시 내집을 장만해 경기도 별내로 이주했다. 그 새 집값이 많이 올라 있었다. 회사 다니는 동안 박봉이기도 했지만 나는 재테크엔 젬병이다. 잠깐 경제부 부동산팀에 근무했을 땐 친구들이 “네가 쓴 부동산 기사 보고 투자해도 되겠느냐”며 웃었다.  

 나는 딸깍발이 기자로 살다 55세에 정년퇴직했다. 다음 달이면 퇴직한 지 만 7년이다. 그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얼마 전 나는 아내에게 “필요를 채워주고 자유를 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진심이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딱히 줄 수 있는 게 없기도 했다. 영화배우 허준호의 아버지 희극배우 고 허장강의 대사를 흉내 낸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은 약발이 다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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