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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

by 젤로

1. 언니 편


내가 처음 들어간 고등학교는 성적순으로 여자, 남자 1 반씩 ‘우반’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나머지 학급을 열반으로 칭하진 않았지만 우반이라는 이름 하나로 자연스레 다른 반에 있는 학생들과 벽이 있었다. 이 학교는 우반 안에서도 20명 만을 뽑아 특별반을 운영했다. 특별반 학생들에게는 방과 후 따로 선행 수업을 시켜주었고 밤 10까지의 자습실을 따로 주었다. 특별반에 들어왔다면 야간자습은 무조건이었다. 처음 입학 시 나는 우반에 특별반이었다. 이렇게 반이 나눠지는지 전혀 몰랐었는데, 일단 선두 그룹 안에 들어왔다는 데에 안도를 했다. 특별반은 3개월에 한 번씩 내신과 모의고사의 결과로 재 배정되었는데 늘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강제적인 분위기의 특별반 시스템이 너무나도 싫었다. 집에 5시에 가고 싶었고 답답한 자습실에 갇혀 밤 10시까지 혼자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중학교까지 학원시스템으로 돌려졌기에 스스로 계획하는 자기주도학습이 약하기도 했다. 나는 자습시간이면 친구들과 학교 복도를 들락날락거리며 놀거나 독서실처럼 막혀있는 책상 안에서 멍하게 졸기 일쑤였다. 그렇게 싫었던 특별반이지만 성적이 낮아서 제명되기엔 자존심이 상했고, 내 발로 나갈 용기는 없었다. 더군다나 학교 내 학생엄마들과 모임을 정기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엄마가 특별반에서 떨어진 나를 창피해하지는 않을까 미안함과 걱정이 컸다. 점점 답답함은 쌓여갔고 나도 모르게 ‘학교 다니기 싫다’ ‘전학 가고 싶다’라는 말을 시작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다른 학원 다니고 싶어, 오늘은 학원 빠지고 친구랑 영화 보러 가고 싶어 등의 요구들 대부분을 수용해 주셨다. 평상시 힘들다는 말을 잘하지 않았던 딸이 학교 다니기 싫다는 칭얼됨의 반복을 그냥 흘리긴 어려우셨을 것이다. 그냥 투정에서 강하게 학교를 바꿔달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 두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호랑이 선생님이 이번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면 지난달보다 낮아진 점수만큼 때리겠다고 하셨다. 겁을 주시려 말씀하셨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손바닥이나 앞에 나가 엉덩이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체벌이 너무도 싫었던 나는 과연 내가 맞아야 할 매는 얼마인지 떨어진 점수를 세기 시작했고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그즈음 친구들과의 사이도 틀어졌다. 작은 동네에 초, 중, 고가 이어지다 보니 말들이 많았다. 누구는 어떻다더라 들리는 소식도 많았고 나와 엄마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말들이 뒤로 돌아 험담처럼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시험이 끝나 야자 없이 일찍 끝나는 날,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우리 술 마셔볼래?라고 제안하며 사물함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모범적이었던 친구가 집 냉장고에서 부모님 술을 몰래 가져왔다며 영웅처럼 꺼내는 모습이 놀라우면서도 재밌었다. 호기심에 여자아이 10명 정도가 교실 뒤에 둘러앉아 한 모금씩 따라 입을 대보았다. 정말 말 그대로 다 같이 입만 대었는데 다음날 우리는 다른 친구들에게 우리 술 마셔봤다? 라며 특별한 일을 경험한 것처럼 얘기했다. 이 사건은 어느 아이의 입을 통해 그 엄마의 입을 통해 아이들이 교실에서 술을 마셨다는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엄마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엄마는 앞으로는 교실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차분히 타이르셨지만, 몇몇 친구들은 엄마에게 심하게 혼난 것 같았다. 그 친구들은 누가 엄마에게 말했는지 따지며 추궁하고 편 가르기를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의 편 가르기는 초, 중등시절 내내 이어졌지만 그땐 정말 지겹고 말 많은 상황이 싫었다. 성적, 친구관계 모든 게 재미없어져 의욕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아빠가 ‘전학시켜 줄게’라고 하셨다. 나는 그냥 옆 동네 학교로 옮겨주길 바라던 거였는데 아빠는 이왕 옮길 거면 서울로 가자고 하셨다. 그것도 강남 8 학군으로. 주변 도시나 학군에 대해 감은 없었지만 강남 8 학군은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해 보였다. 그렇게 강남라이프가 시작되었다.





2. 동생 편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적응이란 걸 잘 못했다. 유치원 때는 발바닥에 물감을 묻히는 놀이가 싫어 끝까지 안 한다고 울었고, 혼자 저녁 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종일반도 싫었다. 유치원을 몇 차례 바꿨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처음으로 왕따를 당했다. 하루아침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 사이에서 투명인간이 된 난 잔뜩 구겨진 종이처럼 움츠러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며칠 밤을 고민하며 왕따가 된 이유를 찾는 일뿐이었다. 나를 필두로 두 번째, 세 번째 왕따가 탄생하면서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자애들 무리 중 가장 기가 셌던 애의 심기를 건드리면 며칠 후부터 왕따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고심 끝에 찾은 이유는 당시 그 애가 싫어하던, 그렇지만 정말 착했던 아이에게 내가 잘해줬기 때문이었다. 주동자에게 이게 나를 왕따 시킨 이유냐고 묻지는 못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난 그 애와 다음 학년에서도 같은 반이 됐다. 왕따 생활은 고달팠지만 난 엄마가 아는 게 더 무서웠다. 전교생이 다 알아도 엄마만은 모르길 바랐다. 나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너 혹시 왕따 당하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들 모임에 갔다가 한 아줌마로부터 딸이 왕따 당하는 것 같던데 알고 있냐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왕따인 것보다 엄마가 알게 됐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러웠다. 아니라고 했지만 엄마의 슬픈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아줌마가 너무 미웠다. 그때 처음으로 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지옥 같던 초등학교를 개근상까지 받으며 무사히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무난한 1학년을 보내며 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고 평범한 2학년이 되었다. 게다가 운 좋게 한 동네 살던 친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행히 같은 초등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엄마들끼리 친해서 어렸을 때 자주 놀던 아이였다. 우린 반갑게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 아이는 쉬는 시간마다 여자애 몇 명, 남자애 몇 명과 함께 놀았고 난 자연스럽게 그 무리의 구성원이 되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마다 매번 놀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해온 여러 활동들이 있었는데 책 읽고 토론하기, 단편소설 쓰기, 신문 스크랩 하기 등이었다. 그 활동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운수 좋은 날, 감자, 메밀꽃 필 무렵 등의 문학작품 읽기로 심화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학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짬나는 시간에 아빠의 숙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남자애들이랑 꽁냥 거리며 노는 게 그리 재밌지 않았다. 반면 '운수 좋은 날'은 너무 재밌었다. 김첨지가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할 때는 너무 슬퍼서 화장실에 달려가 엉엉 울었다. 그렇게 쉬는 시간 5번 중 2번은 무리와 놀지 않고 책을 읽었고, 자습시간에도 몰래 나가기를 고사하고 독서노트를 썼다. 왕따를 경험했음에도 바보같이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들을 깨닫지 못했던 거다. 결국 난 또다시 왕따가 되었다. 그래도 한번 겪어봤다고 적응이 어렵진 않았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이때부터 난 친구라든가 관계라든가 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일을 포기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내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렇게 나름 열심히, 다소 무기력하게 지내던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언니가 서울로 전학을 간다는 거였다. 공부도 월등히 잘하고 친구 관계도 너무 좋았던 언니였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얘길 들어보니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간다는 거였다. 부러워하던 중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막내는 어때? 혹시 같이 가고 싶니?"


온통 회색 같던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난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나도 가고 싶다고, 엄마 그때 걔 알지 어렸을 때 그림 잘 그렸던 ㅇㅇㅇ. 지금 걔랑 같은 반인데 걔가 나 왕따 시켜. 그래서 실은 학교 다니기 싫어.


그렇게 우리는 서울로, 강남 8 학군으로 이사를 갔다.

나에게 있어 이때의 전학은 기나긴 불행의 마침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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