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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로 May 12. 2023

[미국서부 로드트립] 20살의 나를 다시 만나다

6개월 아기와 함께 '데스벨리-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년-홀슈슈밴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여행 한번 가볼까? 툭 던져지는 시작의 진동부터 여행지를 정하는 고민, 멋진 곳과 특색 있는 식당들을 검색하는 설렘을 사랑한다. 아이의 방학기간이나 빨간 날이 붙어있는 날이면 언제나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어디를 갈까 궁리하곤 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해야겠다는 욕구는 여전했다.


미국 서부 하면 그랜드캐년이기에 우리는  '데스벨리-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년-홀슈스밴드' 루트로 5일간의 로드트립을 계획했다. 이번 여행이 더 도전적이었던 이유는 5세, 6개월 두 아이와 함께한다는 사실이다. 총 이동거리가 약 2960km, 총 운전시간은 30시간인 쉽지 않은 여정으로 기존의 여행보다 준비해야 할 것 들도 많았다. 맛집검색보다는 이유식 10개를 만들어 얼리고 전기포트와 분유를 넉넉히 챙겼으며, 첫째 딸을 위한 햇반과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사실 위 곳들은 한번 다녀온 곳이다. 20살 겨울, 친구와 Treck America라는 프로그램으로 3주간 미국 서부에서 남부를 거쳐 동부까지 횡단하는 배낭여행을 했었다.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덴마크 12명 정도 되는 친구들과 국립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도 하고 이동하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웃고 즐겼던 첫 자유여행이자 특별했던 여행이었다. 그 여행지에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간다니.. 정말 감회가 남다르다는 표현이 딱 맞다.


산호세에서부터 4시간쯤 달렸을 즈음 점점 푸릇함은 사라지고 돌산과 협곡이 끝도 없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화성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이집트 고대국가 같기도 한 벌판을 바라보며 1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니 꼭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데스벨리의 이름처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은 황톳빛 땅에서 한 번씩 마주치는 sand dune에서는 피아노 음계처럼 아름답게 반복되는 부드러운 리듬이 느껴졌다. 차에서 내려 모래언덕에 올라 신발과 양말을 벗고 모래를 밟았을 때 차가우면서도 까실거리지만 보드라운 그 느낌은 20살의 천진난만했던 내가 모래 위를 뛰어다녔던 그 촉감 그대로였다. 맨발로 모래를 한참 밟고 있다 눈을 떴는데 5세 딸이 온몸으로 모래를 느끼며 뒹구르고 있었다.


봐도봐도 질리지않던 이 풍경
Death valley의 Sanddune. 사막에 또 가고싶다고 하는 5세 딸


이튿날 데스벨리에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훅 바뀐 이 분위기는 고대국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로 날아온 느낌이었다. 번쩍거리는 화려함과 음악소리는 여전히 쿵쾅거리고 들썩이게 만든다. 메인스트립에 잡은 호텔에 짐을 풀고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를 보기 위해 유모차를 끌고 첫째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데.. 예산이 넉넉지 않아 라스베이거스 중심지에서 떨어진 저렴한 Inn을 잡고 친구와 택시를 타고 나오던 어리고 발랄했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난 번쩍거리는 호텔들을 보며 나도 이런 곳에서 여행하는 날이 올까, 결혼하면 이런 곳에서 잘 수 있는 건가 상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랜드캐니언으로 떠나기 전날 밤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유명한 오쇼의 중앙 앞 좌석에서 딸과 함께 공연을 즐겼는데 무대 가까이에서 공연하는 분들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1시간 반 내내 유난히도 가슴이 일렁거렸다.


여행 3일 차.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랜드캐년까지 가기 위해 약 4시간 정도를 또 달려야 했다. 원래 징징대지 않고 씩씩한 첫째는 차에서 그림 그리고 간간히 동영상도 보며 잘 있어 주었고 걱정했던 우리 둘째도 낮잠 2시간과 과자로 30분 정도 버티고 나면 차에 내려서 잠시 바람을 쏘인 후 내가 뒷자리에 앉아 놀아주다 보니 어느새 국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예전 그랜드캐니언에 왔을 때 가이드가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었다. 일렬로 어깨를 잡고 기차놀이처럼 올라오다 뷰포인트 앞에서 눈을 뜨게 했는데 상상이상으로 광활하면서도 장엄한 그랜드캐년을 온몸으로 감동하며 맞이했었다.

‘와.. 멋지다’ 감탄에 감탄만 했던 20살의 소녀는 '맞아, 이거였어...' 먹먹한 그리움을 내뱉는 37살 엄마가 되었다.

 

이번여행에서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 일부로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을 찾아 잠시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추워 코트를 껴입으면서도 반짝이는 별들을 한참 바라보다 보니 그 당시 친구와 별을 보며 나눴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같이 여행했던 친구에게 메시지와 사진을 보냈다.


"정말 기억이 다 나니? 너무 그립다! 거길 애들과 다시 가다니 정말 부러워"라는 친구의 답장.


나만 그리웠던 건 아니었구나. 고된 운전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그렇게 이번여행을 아이들과 오고 싶었는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난 20살의 나를 잠시 만났고 사랑하는 가족과 다시 올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십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경관들로부터 위로와 힘을 받았다. 한동안 이룬 것 하나 없이 30대가 흘러가는 것 같아 슬프고 작아졌었는데.. 꼭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이 너무나 그대로인 이곳은 두 아이와 함께인 나에게 잘 살아왔다고 안아주는 것 같았다.


오쇼 벨라지오 분수쇼, 모노레일, 하이롤러관람차. 카지노에 가지않아도 빠듯한 일정 :)
마지막 일정이었던 홀슈슈밴드까지. 아이 둘과 로드트립 할만하다.


어떤 여행이든 잠시 일상을 벗어난 모든 시간은 의미 있다. 같이 사는 가족일지라도 남편은 회사, 아이는 유치원 각자의 일상을 살다 보면 온전히 같은 곳을 보고 있긴 힘들다. 여행기간만큼은 가족에게 집중하고 가족만 생각하는 시간이 좋았다. 남편에게 여행을 하며 굳어있던 내가 말랑해진 것 같다고 했더니 그건 '뇌확장'이 된 거라는 너무나 남편스러운 대답에 피식 웃음도 나왔다. 10시간을 운전해서 돌아오는 길 '산타클라라' 표지판을 보며 드디어 집이다! 를 외치는데 언제부터 여기가 내 집이었나 싶은 요상스러움까지 이번 여행은 한동안 여운이 길 게 남을 것 같다.



혹시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니언 일정으로 자유여행 짜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여행 가기 전 남편이 작성했던 피피티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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