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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Oct 05. 2019

영화 <강변호텔> 리뷰

홍상수의 작가적 전회 - 새로운 가능성에 대하여

매번 그렇지만, 이번 작품은 유달리 홍상수의 작품세계가 변모했다. 아마 그건, 카메라와 인물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풍경과 사람, 그리고 소품의 조화를 온전히 잡아내기 위해 카메라의 픽스를 중요시 여겼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유난히 카메라가 흔들린다. 심지어 처음 영환(기주봉)을 방 안에서 잡는 쇼트는, 핸드헬드로 잡은 것처럼 역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새로운 시선에 더불어, 생경한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영환(기주봉)이라는 아버지다. 애초에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족의 존재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가족이 등장할 때에는 어머니의 소극적인 등장쯤에서 머문다(예컨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강덕수(윤여정)이랄지,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의 엄마(김자옥)이랄지). 홍상수의 주안점은 가족에 있기보다는 어느 개인이 겪는 다양한 관계들, 특히 연인이라 부를 수 있는(그것이 윤리적이든 비윤리적이든 간에)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존재를 호명한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다.
 
영화 안으로 돌아와 보자. 영환(기주봉)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아들들인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부른다. 그리고 동시에 애인에게 차여 머물던 상희(김민희)는 연주(송선미)를 불러 위로를 받는다. 전작 ‘풀잎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사건이 병치되어 존재하다가, 각각의 지점들마다 조우하는데 그 조우를 이끄는 것은 전적으로 영환(기주봉)이다. 영환(기주봉)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임과 동시에 시인이고, 시인이 표상하는 바는 모종의 세계다. 그것도 언어로 압축되어 알맹이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의 죽음은 곧 그가 창조한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더 이상 운동할 수 없는 무한히 정적인 세계로의 도입이다. 하지만 동시에 시로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시인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세계도 존재한다. 즉, 영환(기주봉)의 세계와 영환(기주봉)의 창작물로서 존재하는 압축된 모방의 세계가 이중으로 존재한다.
 
영환(기주봉)이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를 불러 “무언가를 주어야 할 텐데 …”라는 말을 하면서 소박한 인형을 남겨주는 것은 유산이라기보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소통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혹은 죽기 일보직전의) 누군가에게 어떤 물건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세계를 추억하는 것이고, 동시에 소멸할(혹은 소멸해버린) 누군가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족, 혹은 연인과 같은 끈끈한 유대관계가 있을 때만 성립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충분한 교류와 교감이 있었을 때만 그 세계는 생성되어 작동한다. 하지만 낯선 사람은 어떠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시인의 역할을 빛을 발한다. 영환(기주봉)이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뒤,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이 만든 시를 읊어주는 것은 단언컨대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들이 자신의 세계를 알 턱이 없으니, 자신의 구축해놓은 세계와의 소통 가능성을 개방해놓은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당연한 말일 수 있겠지만, 영화 역시 창작물로서 존재하는 모종의 세계이다. 관객은 이 세계를 수용함과 동시에 그것과 소통한다. 하지만 이것이 완전히 통제되어있고 제한된 사실만을 재현한다면, 우리는 그 작위성을 지울 수가 없으며 다만 하나의 허구적 세계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여기서 시라는 세계와 영화라는 세계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시가 가지고 있는 압축성은 실재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재현하지 못하며 전혀 다른 세계로서 우리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형식상 재현의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실재계와의 거리있는 연관성을 지울 수 없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동떨어진 세계로서 존재할 뿐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그 차이를 인정하고 체념하기 마련인데, 홍상수는 방법적 우회를 선택한다. 애당초 존재하는 재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이것이 실재계 그 자체인 것처럼 내비친다. 고정되지 않은 카메라, 이로 인해 생기는 불균질함 속에서 오는 생경함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이것이 통제되어 있지만 통제되어 있지 않음을, 선택된 제한적 재현이 아니라 우연한 불완전한 세계의 모습임을 알리는 것이다. 전작들과 같은 정적인 카메라를 스크린에서 치우고, 동적인 시선을 채택함으로써 실재계와 결부된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전작들에서는 줌인과 줌아웃을 바탕으로 실현했다). 마침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가 밖에 나갔을 때 눈이 소복하게 쌓인 풍경을 담아내는 것도, 병수(유준상)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등장한 고양이를 클로즈업해서 잡아낸 것도, 이것이 내가 만들어낸, 그러나 결코 작위적이지 않고 통제되어있지 않은, 실재의 세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을 체험하는 우리에게, 그 세계가 실재의 세계라고 착각할 수 있게 해 준다. 홍상수는 전작과의 대비를 통해 이 모순된 상황, 즉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현실과의 이질감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보고자 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어떠한 혼란을 야기시킨다. 정말 ‘강변호텔’의 세계가 우리의 실재계와 맞닿아있다면, 이것은 누구의 세계인가 라는 문제. 새삼스럽지만, 대상과 떨어져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세계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대상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문제는 대상(특히 허구적 대상)과 결부되어 있는 세계가 실재계와 아주 긴밀한 연관을 띠고 있을 때 발생한다. 재현을 넘어서 초超재현으로서 존재하는 세계. 이러한 세계가 구축되었을 때, 우리는 그 세계를 대상과 일치시켜버린다. 그 대상이 구축한 세계가 곧 대상이고, 그 세계가 곧 대상이라는 관념을 말이다. 단순한 세계 구축에서 실재로의 도약을 선언한 ‘강변호텔’ 역시 이에 해당된다. 즉, 이 ‘강변호텔’이라는 작품은 홍상수와 일치되어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영환(기주봉)은 홍상수 작품의 어느 인물보다 홍상수의 페르소나에 가깝다. 전술한 바처럼 이 영화가 실재계와 무관하기보단 오히려 실재계를 붙잡고 끈질기게 그 가능성을 연 것이라면, 이 영화는 전적으로 홍상수가 바라보고 겪고 있는 세계이다. 잠깐 영화 밖으로 나가보자. 홍상수의 세계는 어떠한가. 그것이 윤리적이든 비윤리적이든 온갖 비난성 추측과 인신공격은 물론이고, 그의 삶을 존중해주는 사람은 극소수다. 하지만 그 존중마저 냉소적일 뿐,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런 식으로 처자식을 버리는 건 아닌 거 같아”- 어떠한 배려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홍상수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해서 항변하는 것이고 하나는 침묵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후자를 선택한 홍상수에게 그 반대급부로서 드러나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 즉 소통할 수 없는 세계는 기어코 죽음에 이르기 마련이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시에서의 ‘이카’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영환(기주봉)이 하필 아버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극 중 내내 영환(기주봉)이 소통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한 것은 그간 홍상수가 보여줬던 방법과 상반됨과 동시에 모종의 전회를 의미한다. 관객 – 창작계로서 소통하며 자신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묵음 처리했던 과거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관객 – 창작자이자 창작계로서의 소통을 제시하여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국에 이르러 맞이하는 영환(기주봉)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소통의 부재, 다시 말해 창작자의 죽음으로 인해 휑하니 홀로 남겨진 세계뿐이다.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대상과 그 대상에서 만들어진 세계와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관객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다시 원래의 도식, 즉 관객 – 창작계로서의 소통뿐이다. 새로운 소통방식의 포문을 한껏 열어둔 후 종국에 닫혀버리는 것은, 맨 처음 쇼트에서 영환(기주봉)이 죽음을 읊조린 것처럼 당연한 수순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홍상수에게 있어 이것은 새로운 도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결과에 어찌 됐든 과정 속에서 드러난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창작 세계를 한층 넓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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