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석주 Oct 04. 2019

‘조커’가 아쉬운 이유

어느 한 쇼트에 관하여.

본 글을 시작하기 앞서, 한 가지 전제를 깔고 가자. ‘조커’라는 영화가 가진 파급력에 대해서 말이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기록적인 오픈 스코어를 달성하며(적어도 한국에서는) 연일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니, 이 영화는 단언컨대 그 파급력이 대단하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한 2차 생산, 예컨대 비평이든 리뷰이든 심지어 모종의 유튜브 영상이든, 그런 것들은 범람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조커’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해석을 언급하기에는 사회적으로 이미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어, 다른 방향으로 우회를 해볼까 한다. 바로 어느 한 쇼트에 대해서.

기억해보자. 아서 플렉이 토마스 웨인을 처음 만나던 장면을. 아서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며 토마스에게 구걸하듯 말하지만, 토마스는 가차 없다. 오히려 그에게 알고 있던 진실이 허구라는 것을 말하며 그를 흠씬 두들겨 팬다. 이 장면은 아서 개인에게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데, 이 기점을 바탕으로 아서는 본격적으로 조커가 된다.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 아서라는 자아를 봉인하고 조커로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중요한 장면은 이데올로기적 맥거핀에 불과하다. 바로 그 전의 쇼트 때문에 말이다. 다시 기억해보자. 아서가 토마스를 만나기 전, 그가 향한 곳은 어느 한 극장이다. 그 극장 앞에서는 광대로 표상된 빈민층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고, 극장 안은 부유층들의 유희 공간이다. 계급적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아서의 시점을 따라간 카메라는 그 부유층들이 어떤 것을 유희 거리로 삼고 있는지 보여준다. 바로,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이다. 채플린과 아서가 코미디언이라는 공통점을 잠시 차치하더라도, 하필 유희 거리가 ‘모던타임스’라는 것은 유달리 독해 보인다. 아서가 속한 집단은 극장 앞에서 분개하며 시위를 펼치고 있고, 채플린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 역시 이와 비슷하다. 즉, 인간의 도구화를 풍자하며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코미디의 장르라는 외피를 빌려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감독은 이른바 브레히트적 전략을 선보인다. ‘모던타임스’가 상영되는 스크린 정 중앙에 아서를 배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주인공인 채플린은 소거되고, 아서만이 그 스크린 위를 부유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말한다. “이건 아서의 얘기이지, 여기 모인 부유층들의 향락 도구가 아니야.” ‘모던타임스’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아서가 속한 집단의 생존적 문제임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부유층들이 자신들 만의 은밀하고 접근 불가능한 공간에서 이 영화를 즐기는 것은 아서를 비롯한 빈민층, 더 나아가 밖에 존재하는 관객들에게 이것이 기만임을 알리는 감독의 선언적 쇼트인 것이다.

그럼 이 선언은 유효할까? 더 단적으로, 이것은 관객들에게 ‘낯설게’ 다가가고 있는가? 다시 들여다보자. ‘모던타임스’가 상영되고 있는 그 스크린에 중앙에 서서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서이다. 그렇다면 아서가 중앙에 서있는 ‘조커’를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다.
구태여 말을 보탤 필요 없이, 우리가 보고 있는 아서는 아서 그 자체가 아니라, 아서를 연기하는 와킨 피닉스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와킨 피닉스가 펼치는 열연은 메소드에 가깝다. 다시 말해, ‘조커’라는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몰입에 가깝지, 결코 소외가 아니다. 그렇기에 아서라는 인물을 통해 ‘모던타임스’의 몰입을 깨트리고 그 안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것은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와킨 피닉스라는 인물을 통해 ‘조커’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해진 것이다. 두 개의 프레임, 즉 아서가 보는 내적 프레임과 관객이 보는 외적 프레임을 동시에 다루면서 오직 내적 프레임의 소외만 발생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후 영화의 모든 폭동 쇼트가 잠재적 서사 혹은 인물의 정서를 위해 수단화된 것은 착각이 아니다. 예컨대, 브루스라는 코믹스 인물의 유년시절 비밀을 위해, 폭도들의 찬양을 통한 조커의 나르시시즘적 고양을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그 쇼트는 하나의 낭비가 되어버리고, 단순한 서사적 운반장치의 역할로서 그 힘을 다하게 된다.
적어도 감독이 그 쇼트를 통해 모종의 각성을 원했으면 내적 프레임과 외적 프레임의 인물의 지향점을 동일시하여 이중의 폭로를 성공시켰거나, 아니면 연이은 폭동 씬들을 조커와 계속해서 열거하여 잠재적 폭로성을 확보하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달성되지 않고, 단순히 하나의 쇼트만 섬처럼 남겨져 있어 의미가 휘발되어 버린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