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남부에는 ‘끄망kemang’이라는 지역이 있다. 20여 년 전에 처음 자카르타에 왔을 때 이 곳은 서양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외국인 특별 거주지 같은 독특한 인상을 풍겼다. 오래된 옛집들 사이로 수많은 갤러리와 작은 소품 가게들, 공방을 겸한 가구점, 그리고 인도네시아만의 특색을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들로 꾸며진 작은 음식점들이 무척 많았고, 곳곳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옛날의 명성이나 예술적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고 점점 상업화되어 가는 모습이지만, 여전히 끄망은 오랜 원주민들과 외국인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지역이기도 하다.
두타 갤러리는 끄망 북부에 위치해 있다. 얼핏 지나쳐버리기 쉬운 작은 길 모퉁이에 ‘Duta gallery’라고 쓰인 타원형의 동판이 꽃잎 사이로 가려져 있다. 입구의 너른 마당에 서서 갤러리 안쪽을 들여다보자면, 좋아하는 시인의 새 시집 한 권을 막 펼치려는 순간처럼 두근거린다. 정원으로 들어서는 돌길 위로 부겐빌레아와 깜보자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엽서처럼 예쁜 꽃길을 만들어 놓았다. 꽃같이 어여쁜 마음이 든다.
아치형의 정문 오른편에는 제법 규모가 큰 인디아 풍의 대리석 건물이 있는데, 그곳은 아직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그림들이 천 여 점 넘게 숨어있는 비밀의 방이다. 일반에게는 개방되지 않고,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문이 열리지도 않는다.
갤러리는 가운데 정원을 두고 왼편으로 한 개의 상설 전시장과 안쪽의 기획 전시장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6년에 당시 문화교육부 장관이었던 Fuad Hasan이 처음 갤러리를 열었고, 지금은 솔로 왕족인 Wiwoho Basuki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갤러리 관장은 프랑스 인 Didier Hamel이 맡고 있다. 특히 Wiwoho Basuki 부부는 한국인들과도 인연이 깊어서 한, 인니 문화연구원 이주 최하는 ‘인도네시아 이야기-인터넷 문학상’ 시상식에 인도네시아 예술가 상을 지정해 직접 시상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 역시 한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한국-인도네시아 예술가들과의 만남에서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인도네시아 미술 시장의 미래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았고,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작품으로 만나는 장을 마련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최근에는 중국 상하이에 미술관을 열고 세계적인 갤러리로 성장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다.
두타 갤러리는 인도네시아 인 화가들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외국인 화가들에게도 갤러리 문을 활짝 열어두고, 특히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를 기획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새로운 전시가 열릴 때마다 오프닝 파티 초대장을 받는 행운을 누리는 덕분에 가끔 저녁 시간에 갤러리를 방문할 때가 있다. 대부분 오래 서로 얼굴을 익혀 온 인도네시아 미술 애호가들이 모이고 간단한 음식과 와인을 마시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전시를 축하한다. 거기에서 친구가 된 또래 화가들의 전시가 열릴 때는 특별히 여러 번 갤러리를 찾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는 와양을 소재로 다양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그림을 그리는 동갑내기 친구 TOTO의 전시가 열려 명랑하고 발랄한 그의 그림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정원 왼편의 상설전시장에는 바틱 기법으로 인도네시아의 우화와 전설을 그려온 Sukamto와 Umar 같은 대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고, 네덜란드인 화가 Pierre Guillaume의 분홍과 보라로 입혀진 발리의 풍경화를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몇 년 전 그의 전시 오프닝 파티에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색감으로 독특하게 그려낸 발리의 풍경을 보며 절로 마음이 촉촉해졌는데, 막상 화가를 만나니 네덜란드의 마초 아저씨 분위기를 풍기는 큰 키의 아저씨가 등장해서 깜짝 놀랐던 유쾌한 추억도 있다. 그 외에도 Locatelly, R.Smith, Theo Meier 같은 프랑스, 독일,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온 화가들의 그림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여성 화가인 Riyani의 그림과 그녀의 남편인 Bondan의 그림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리 야니의 그림은 주로 여성을 소재로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지만, 본단의 그림은 인도네시아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코믹하고 유쾌하게 그려내어 보는 사람을 즐겁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자카르타의 수많은 갤러리 중에서 유독 두타 갤러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시장 가운데의 아름다운 정원 때문이다. 그 정원은 인위적으로 다듬고 깎아낸 느낌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그저 마음 넉넉한 유럽의 어느 시골집 부부가 정성스럽게 가꾸는 소박한 정원을 연상케 한다. 창문 곳곳에 놓인 나무 조각과 정원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언제고 정원이 있는 집을 갖게 된다면 꼭 두타 갤러리의 정원 풍경을 만들어 내고 싶다. 거기에 지붕이 있는 작은 그네를 하나쯤 매달아서 대롱거리며 시집을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아온 것이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지만, 몸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 부끄럽고 민망할만치 굴절 없는 삶을 누려왔다. 그렇지만 또 제나라 땅이 아닌 곳에서 살면서 몹시 권태롭고 한 마디로 설명하기 몹시 어려운 복합적인 우울과 무기력을 느낄 때가 많다. 두타 갤러리는 그럴 적마다 혼자 찾아가는 비밀의 정원이다. 나는 그곳에서 잠시 잃어버렸던 내 이야기들을 찾아온다. 나의 그림자와 인사를 나누고 헛것인 상념들을 털어내고 돌아온다. 마음 안에 그런 정원을 하나쯤 두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글: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자카르타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 <인작>과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