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아이에게 물었는데..
딸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정도의 일이다.
아침 식탁 위에 딸아이 수저통이 그대로 놓여있다.
그때는 각자 수저를 가져가던 시절이라 아침마다 수저통을 챙겨서 등교해야 했다.
그런데 딸아이가 수저통을 넣지 않은 채로 신발장으로 가고 있었다.
나: 숟가락통 챙겼니?
딸: 어 챙겼어
나: 진짜 챙겼어? 가방에 넣었어?(알아채기를 바라며)
딸: 어, 넣었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문을 열고 나간다).
딸아이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런 순간 엄마들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선택은 아이를 위해 '독한 엄마'가 되자는 것이다.
결국, 딸아이는 그냥 학교로 갔고 중학교 교사인 나는 딸아이의 점심시간 모습이 그려졌다.
평소 나는 가져갈 준비물은 준비하는 것은 도와 주되 아이 가방까지 챙겨주진 않기로 하였다.
책가방을 챙기는 일는 스스로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아이에게도 미리 말했었다.
그래서 가정통신문도 아이에게 내일 준비물이 뭔지 자신이 가정통신문을 꺼내보고 직접 말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집에서 딸아이와 나눈 대화 중 일부..
딸: 오늘 점심시간에 보니 숟가락을 안가져갔어
나: 저런, 그래서 어떻게 했니?
딸: 선생님한테 말씀드렸더니, 식당 가서 영양사선생님한테 숟가락 빌려다 먹으라 하셔서.. 그랬지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딸과 아들이 자기 일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랬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자기 할 일을 잘 챙기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기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이들은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고 한다.
아기는 첫 발을 떼고 걸음마를 배우기까지 3000번을 넘어진다고 한다.
걸음마를 배울 때까지 평균적으로 하루에 20번씩은 넘어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보면 성공한다고 한다.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아이가 자기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르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아이에게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고 참고 기다려주자는 것이었다.
이 날 숟가락을 넣었다고 자신하며 학교에 간 딸아이는 점심시간에 당황했을 것이다.
실수를 깨닫고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점심도 바로 먹지 못했다.
선생님께 자신의 실수를 말했고, 선생님의 지시대로 식당에 가서 수저를 빌려오는 일을 했다.
이렇게 어려운 경험을 하면서 앞으로 더 잘 챙겨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딸아이는 그 이후에 등교할 때는 숟가락통을 더 잘 챙겼다.
이런 비슷한 일은 실내화 주머니를 챙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둘째인 아들애가 실내화를 챙기지 않은 것을 보고 실내화 챙겼나고 물었더니 챙겼다며 그냥 나갔다.
이런 순간은 엄마인 나에게는 늘 갈등과 고민의 순간이기도 했다.
미리 잘 챙기거나 챙겼냐고 물을 때 한번 더 깨닫기를 바랬지만 안 그런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실내화를 안가져가서 하루 종일 양말만 신고 학교생활을 했다고 하였다.
아침에 그냥 나가는 아들애를 보며,
실내생활이고 하루 정도이니 이 정도의 어려움을 겪는 것는 아이의 성장에 약이 될거라 생각했다.
숟가락을 못 챙겨가서 식당에 가서 '숟가락 빌려주세요'라고 자신의 실수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을 딸,
그리고 실내화를 놓고 가서 하루 종일 맨 발로 생활하며 실내화의 소중함을 종일 느꼈을 아들.
이 실수는 분명 두 아이가 크는 과정에서 준비물을 잘 챙겨야겠다는 교육과 성장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실수를 알면서도 기다리며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 실수로 인해 아이가 어려움을 겪을 것을 아는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뭐든지 미리 알아서 해주는 것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아이가 실수를 통해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일에 관심은 갖되,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는 실수를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허용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실수를 대신 해결해주려 하지 않고,
참고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독한 엄마'가 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