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여서 견딜 수 있었던, 연말 이야기
코로나로 우울할 뻔했던 연말이었다. 전 세계는 여전히 코로나의 긴 터널 속에 갇혀 있었다.
유학생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뉴스도 흘러나왔다. 마음만큼 생활도 팍팍해졌다. 물가는 치솟고 설상가상으로 환율도 올랐다. 생활비 부담이 두 배로 늘었다.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환전하며 생활비를 아꼈다. 신랑은 한국에서 전기장판 하나로 겨울을 나며 보일러 비를 아꼈다. 그 와중에 첫째 아이는 사춘기를 맞았다.
모든 게 변했고 혼란스러웠다. ‘이쯤에서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싶어 몇 번이고 비행기표를 검색하다 창을 닫았다.
기말고사 기간, 아이들이 집안일을 도와준 덕분에 가까스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무렵이었다. 친구 같은 선배 언니가 만나러 온다는 것이다. 아이들 나이도 비슷하고, 미국 유학생활 중이라는 공통점 덕에 서로 의지하며 버텨온 사이였다. 신랑이 없이 맞이하는 쓸쓸한 연말, 언니의 방문은 천군만마를 얻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정점 속 언니의 방문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하와이로 떠나기 전 72시간 내에 받은 코로나 검사 결과가 필요했다.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양성이면 출발할 수 없었다. 유효시간이 임박한 출발 전날 늦은 오후에서야 겨우 음성 판정을 받았다.
언니가 사는 곳은 미국 북쪽, 캐나다와 맞닿아 있는 메인 주였다. 밤새 폭설이 내려 우버도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언니는 눈 덮인 새벽길을 직접 차를 몰아 공항에 도착했다. 경유 시간까지 포함해 꼬박 12시간이나 걸려 마침내 하와이에 도착했다.
며칠은 아는 분 콘도에 머물기로 했다. 콘도 창밖에 바다가 정면으로 보였다. 개인 셰프로 활동하는 지인이 직접 요리한 랍스터, 스테이크, 마이타이 칵테일은 하와이 최고의 요리였다. 두 유학생 엄마의 마음에 감동의 물결이 흘렀다.
새벽엔 밖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와서 잠을 설쳤다. 다행히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히 개었다. 하와이다웠다. 창 밖 커다란 무지개가 바다까지 드리우며 언니를 반겼다.
애들을 콘도 수영장에 들여보내고 잠시 집에 들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울리는 전화벨. 아이들이 물이 차가워 놀 수가 없다며 당장 와달라고 했다. 급히 숙소로 오느라 집에서 가져오려던 이불과 김치를 깜빡했다.
숙소에 크리스마스트리도 가져왔다. 애들에게 영화를 틀어주고 엄마들은 달이 비치는 바다를 감상하며 맥주를 즐겼다. 정신없던 며칠을 떠올리니 이 정도 힐링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일요일에는 돌 파인애플 농장과 노스쇼어로 향했다. 하와이 대표 바비큐 요리인 ‘훌리훌리 치킨’이 주말에만 팔기 때문이다.
‘훌리(Huli)'는 하와이 말로 ’ 뒤집다 ‘는 뜻인데 긴 꼬챙이에 닭고기를 줄지어 꿰고 숯불 위에서 굽는 음식이다. 아이들은 연기 속에 치킨이 빙글빙글 구워지는 와중에도 그 옆에서 무심하게 돌아다니는 야생 닭을 보며 경악했다. 그러면서 또 치킨은 맛있다는 모습이 웃겼다.
하와이 3대 버거인 쿠아아이나 버거도 맛보고, 벌에 쫓겨 다니며 마츠모토 아이스 쉐이브도 먹었다. 지오반니 새우트럭에서 마늘과 버터 새우를 잔뜩 먹고 배를 두드렸다.
돌 파인애플 농장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기차를 타고 미로를 헤맸다. 기념품 샵에서 진주조개 체험 행사에 참여했는데 진주알이 2개나 나왔다. 축하한다며 펜던트 제작비로 개당 50불을 요구했다. 아이가 엄마 생일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해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라니아케아 비치에서 거북이를 못 봐서 아쉬웠지만 와이메아 비치에서 높은 겨울 파도 사이 노을을 감상했다.
"이모, 어제 간 곳(노스쇼어) 보다 약하고 오늘 간 곳(알라모아나 비치) 보다 더 센 파도는 어디예요?"
궁리 끝에 간 카할라 호텔 비치에는 다행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파도가 있었다. 호텔 내 플루메리아 식당을 이용해서 4시간 무료로 주차하며 바다에서 실컷 놀았다. 처음 먹어본 튀긴 아히 무스비에 아이들은 대만족이었고, 햄버거와 칵테일 두 잔으로 호캉스 기분을 냈다.
남자아이 둘만 키우는 언니네, 딸만 둘인 우리 집. 다른 점이 많았다. 오해가 생겨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엄마들이 눈치 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재미있기도 했다. 해리포터 코딱지 맛 젤리를 나누며 웃다 화해하고,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하나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화성인’과 ‘금성인’만큼 차이 나는 아이들이 서로 알아가는 것만으로 다채로웠다.
남자아이들은 확실히 재미있는 활동이 필요했다. 여자 셋이 살면서 못했던 일을 언니 가족과 함께 했다.
매일 수영장이나 바다에서 놀았다. 서핑도 배우고 ‘웻 앤 와일드’라는 워터 파크에도 갔다. 홀푸드와 다이소에서 일회용 크리스마스 접시와 컵, 진저 브래드 케이크를 사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양키 스왑’이라고 가위 바위 보로 순서 정해서 선물을 고르는 놀이도 했다. 언니네 첫째는 달걀볶음밥을, 우리 집 둘째는 떡볶이와 투움바 파스타를 요리해서 나누어 먹기도 하며 정을 쌓았다.
내 생일날 아침. 언니가 분주하게 상을 차렸다. 언니를 도와 둘째 아들이 까준 마늘이 듬뿍 들어간 잡채와 미역국은 더없이 따뜻했다.
오늘은 언니가 다 산다며, 저녁에도 식당에 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카아코에 있는 판야 비스트로. 코로나로 다섯 명 집합 금지라 따로 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따로 또 같이 즐거운 저녁식사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 실패하고 두 번째 방문하고도 땡볕에서 오래 기다렸던 하나우마 베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한 시간 걷고 한 시간 기다려 밥을 먹었던 와이키키 에그 앤 띵스 식당, 애써 고른 크록스 지비츠 장식을 잃어버리거나 수영장 바로 앞에서 차가 방전되었을 때는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시청 앞 크리스마스 시티라이트에 커다란 마스크 쓴 산타 할아버지와 할머니 동상은 웃겼고, 맥 앤 치즈와 계란초밥만 있으면 세상 행복해하던 언니 둘째 아이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코올라니 해변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봤다고 할 때는 뭉클했다.
무엇보다 아이들 때문에 신경은 쓰였어도 매일 맥주, 와인, 칵테일을 나누어 마시던 엄마들의 시간은 소중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방학마다 언니가 사는 메인을 방문하거나 텍사스, 보스턴을 함께 여행했다.
언니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기에 서로 못난 아이들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서운해서 혼내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끼리 섭섭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 내 아이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엄마 이상으로 달래고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직 어려 모를 수 있지만, 엄마들만큼 훌륭하게 자랄 녀석들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제 훌쩍 커버려 사춘기 문턱을 넘어선 아이들. 다시 함께하는 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고생하며 여행했던 추억은 마음속에 고스란히 간직할 것이다.
엄마로서 작은 바람은, 모든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음을 알기,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니고, 배려가 지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기다. 공부나 좋은 대학보다 중요한 이런 지혜를 얻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은, 엄마들 때문에 너희들도 함께 고생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 너희가 남다른 고생을 통해 인생을 배웠기를, 엄마의 유학길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음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언니와 나,
한국 돌아가서 다시 적응해야 할 아이들 걱정에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은 직장 맘으로서 최선의 선택이었고, 당장 공부나 성적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들과 교류하고, 시야를 넓혀주었음을 잊지 말자.
우리도 사람이라 듣기 싫은 잔소리를 쏟아낼 때도 있지만, 이 시간도 지나가면 추억이고, 함께 고생한 만큼 앞으로 아이들에게 닥칠 힘든 일도 잘 이겨낼 수 있다고 믿자.
“우리 정말, 대단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