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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지 않고 떠나기

하와이 정리 1

by 만석맘 지은

떠날 준비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정착은 짧은 시간에 이뤄지지 않았다. 4년 묵은 살림이다. 수많은 물건과 기억이 함께 쌓였다. 정착할 때와 반대로 하면 된다며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거꾸로 되돌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더디고 무거웠다. 하나도 남기지 않아야 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싶었다. 물건 정리는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 일. 곧 이별의 과정이었다. 하나씩 꺼내어 요리하고, 나누고, 버리고, 포장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이삿짐센터 직원이 되고, 청소부가 되고, 식당 주인이 되었다.


아이들과 정리


아이들 물건은 아이들이 직접 정리하게 했다. 아이들도 정리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추억 정리는 어른이나 아이나 힘들었다. 작아져버린 옷과 신발조차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물건에는 아이들의 웃음과 행복이 스며들었으리라.

“잘 써줄 누군가에게 가는 거야.”

아이를 위로하며 아쉬운 마음은 사진으로 남겼다. 나눔은 이별을 덜 아프게 하는 다정한 기술이었다.


나눔


지인들에게 필요 없는 물건은 한인 커뮤니티에 내놓았다. 나도 카페 덕분에 저렴하게 물건을 마련했었다. 싸게 올린 물건에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가져가는 분이 건네는 고맙다는 인사가 서운함을 달래주었다.

남은 물건은 콘도 1층 작은 박스에 두었다. 이웃끼리 나누도록 배려한 공간이었다. 우리도 종종 그곳에서 선물을 받았다. 우리처럼 누군가 기쁘게 사용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누고 받고 또 나누었다.


코스트코의 배려


정리 중에 2년 전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자동차 배터리 충전기를 발견했다. 한 번도 쓰지 못해 새것이나 다름없는 충전기였다. 그런데 반의 반값으로 내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그러다 코스트코에서 환불 가능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 먹고 조금 남은 과자도 환불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혹시 몰라 영수증도 없이 코스트코 환불 창구로 향했다. 직원은 이 제품 정보가 없는데 언제 구매했는지 물었다. 대략 날짜와 구매 장소를 알려주니 또 한참을 찾았다. 아무래도 정보가 없고 내 회원 카드 구매내역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지인이 대신 구매했던 기억이 나서 지인 정보를 알려주니 인터내셔널 가입 회원은 전산으로 확인이 안 된다며 매니저까지 불렀다. 미안한 표정을 지었더니

"정확한 금액을 알아야 환불이 가능해요, 괜찮아요."

라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30여분 후, 결국 비슷한 제품을 찾아냈다. 이전 가격보다 몇 불 싼 가격으로 환불해 줄 수 있는데 괜찮은지 물었다. 금액은 중요치 않았다. 2년 전 구매한 물건이고 기록에도 없는 물건이었다. 환불보다 더 고마운 건 직원들의 친절과 정성이었다.


뜻밖의 인연


자동차 매매는 직거래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도 별로 안 남았는데 예상 못한 문제가 생기길 바라지 않았다. 출국 전날까지 타는 조건으로 중고차 딜러에게 쉽게 팔고 싶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중고차 가격이 올랐다는 뉴스와 달리 딜러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했다.

할 수 없이 한인 커뮤니티에 직거래 광고를 올렸다. 게시 글을 보고 연락 온 사람은 뜻밖에도 내 블로그를 오래 봐왔다는 구독자였다. 내 차라서 꼭 사고 싶다고 하셨다. 출국 전날까지 차를 쓰게 해 주고 마지막 묵은 호텔까지 태워주셨다. 그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분은 복덩이 막둥이까지 아이 셋과 건강한 하와이 생활을 즐기고 있다. 차를 보내고 사람을 얻었다.


짐 싸기 테트리스


아무리 정리하고 버려도 짐이 많았다. 수하물 8개와 기내 캐리어, 백팩까지 이삿짐이 넘쳤다. 이민 가방을 테트리스처럼 채웠다. 전날까지 밤새 가방을 손저울로 재고도 어쩔 수 없이 남겨야 하는 물건이 생겼다.

드디어 출국날. 공항에서 직원이 말했다.

“수하물 모두 무게 초과입니다. 하나당 50불씩 400불 추가요금 발생했어요.”

눈앞이 캄캄했다. 그 순간 직원이 조용히 추가 요금 없이 그냥 부쳐주겠다고 했다. 눈물이 왈칵 났다. 하와이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품어주었다.


수속을 다 밟고 비행기에 앉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이 물건들을 정말 버리시는 건가요?”

방에 남겨둔 물건들 때문에 호텔에서 전화가 왔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와이를 떠났다.


떠나며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실 가장 많이 남겼다. 마음도 물건도 인연도.

다시 돌아오리라. 그곳에서 함께한 모든 순간들을 다시 만나리라.

함께여서 고마웠습니다, 하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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