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2(일) |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취향의 변화
어릴적부터 우리집 거실에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괴상하게 생긴 스피커가 있었고, 책장 하나는 온통 클래식 CD로 가득차 있었다. 매주 일요일에는 한참 늦잠을 자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웅장한 악기 소리에 잠에서 깨는 게 일상이었다. 그 정도로 부모님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셨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단잠을 방해하는 쿵쿵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쇼팽, 모차르트, 바흐의 곡들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지만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결국 몇 살 더 먹고나서는 선생님을 졸라 이루마, 유키 구라모토의 곡들을 배우고 연주했다. 그게 나와 클래식이 맺었던 인연의 전부였다.
그러다 몇 주 전 신년회에서 친구를 만나 요즘 클래식을 즐겨듣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이에 디자인된 작업들을 좋아하고,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친구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그 취향이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조성진 콘서트는 물론 나로서는 이름이 낯선 이들의 공연을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에 신기해서 계속 그 생각이 기억에 남았다.
친구를 만난지 얼마 안돼 회사로 출근하는 길에 어떤 노래를 들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출근길의 플레이리스트를 고르는 일은 거의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지만 가끔은 참 어렵다. 침대에서 뒹굴거릴 시간 없이 일어나 부랴부랴 씻고 집을 나선 직후, 아직 가시지 않은 잠 기운과 힘차게 일상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오가는 그 시간. 이 시간에는 시원한 냉수 한 잔처럼 내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를 채워줄 그런 음악이 필요하다. 그러니 너무 부드러운 음악도 안되고, 너무 시끄럽거나 정신없는 음악도 안된다. 그동안 들었던 익숙한 음악도 싫다. 그 날도 이런 어려움으로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까지 첫 곡도 못 정한 상태였다. 그때 문득 친구가 생각이 났고, 바로 카톡을 보냈다. '아침에 들을만한 클래식 음악 추천해줄래?'
친구는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집을 추천해줬다. 친구가 말해준 연주자 Radu Lupu의 앨범을 찾아 드디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하는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이 떠올랐다. 적당히 잔잔하면서도 완급과 강약이 다채로운 멜로디가 잠 기운을 매섭게 내쫓지 않고 하루의 리듬 속으로 내가 잘 들어갈 수 있게 이리저리 나를 달래주는 따뜻한 손길 같았다. 그 손길이 참 편안하고 기분 좋았다. (듣기)
그 날 이후 자연스럽게 내게는 아침 의식이 하나 생겼다. 바로 눈 뜨자마자 클래식을 듣는 것이다. 기상 알람이 울리면 반쯤 감긴 눈으로 핸드폰에서 클래식을 찾아 3분 정도 누운 채로 음악을 듣는다. 조금 더 잠을 청하고 싶은 평일에는 나를 달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아침을 즐길 수 있는 주말에는 그 여유를 마음껏 누리는 기분으로 듣는다. 자기 전 다음 날 아침을 위한 음악을 고르는 것도 재미있다. 마침 지난 주말 책장에서 박종호씨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시리즈를 발견했는데, 정말 보물 같은 책이다. 곡에 대한 음악가와 연주자의 이야기가 쓰여 있어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친근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처음 들었던 곡은 '밤의 숨결을 깨우는 피아노의 정수' 로 소개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은 바흐와 골트베르크의 후원가였던 카이저링크 백작을 위한 자장가로 만들어진 곡인데, 통통 튀는 멜로디가 아침에 듣기에도 좋다. 곡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1개의 주제를 변주하여 만들어진 31개의 변주곡이라 익숙한듯 계속 새로운 곡들이 이어진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생명력 넘치는 연주로 유명했는데 그의 앨범에는 연주 도중 음을 따라 부르는 특유의 흥얼거림이 섞여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의 이끌려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흥얼거림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그의 연주가 왜 유명한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듣기)
하루 짧은 시간 만나는 클래식이지만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고 새로이 발견하는 재미가 요즘 내 일상의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