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시의 틈, 나는 골목을 좋아한다.
학부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건축을 공부하며 도시를 걷기 시작했고, 대학원에 가서는 더 자주 걸었다. 공간을 읽는 법,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건물과 길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관찰했다. 그렇게 도시를 걷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서울 곳곳의 대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골목을 만나게 된다. 북정마을, 창신동, 익선동, 흥인동, 황학동, 삼청동. 대지를 보러 가는 길에, 혹은 대지를 보고 난 후에, 늘 주변을 걸었다.
도시의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사람들을 만나고, 길 양쪽으로 펼쳐진 누군가의 일상에 시선이 머문다.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시간의 건물이 들어서며 공간을 채우고, 그 사이로 새로운 길이 생겨난다. 보물처럼 숨어 있던 문이나 작은 길을 발견할 때면 잠시 멈추고 기대와 상상을 하곤 했다. 문득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이 넓게 펼쳐지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지붕과 전선, 삶의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렇게 끊임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제일 높은 곳에 닿아 있다. 그때 마주하는 건너편의 풍경은 언제나 그랬듯,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도시의 진짜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골목을 거닐며 풍경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삶을 읽는 일이 내 일상이 되었다. 서울뿐 아니라 수원, 전주, 부산, 여수에서도, 심지어 유럽의 도시를 여행할 때도 골목이 주는 힘을 느꼈다. 골목은 시간이 흐르며 보행로를 중심으로 한쪽이 바뀌고, 또 다른 길이 생기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내가 하는 일을 이야기해 보자.
나는 대형 종합건축사무소에서 실내 설계를 맡고 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사업성부터 검토한다. 평당 분양가, 예상 임대료, 투자 회수 기간. 설계 단계에서는 법규를 맞추고, 동선을 효율화하고, 평형을 최적화한다. 시공 단계에서는 일정과 예산을 관리하고, 준공 후에는 공실률을 낮추기 위한 전략을 세운다. 공간은 비용이자 시간이고, 곧 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이전 회사에서는 호텔, 리조트, 고급 주거공간을 주로 진행했다. 브랜드가 기획한 동선, 의도된 디테일, 정제된 마감, 완성도 높은 결과물. 그렇게 정제된 언어에 익숙해졌다. 완벽한 코너 디테일, 계산된 조도, 밀리미터 단위로 조정되는 마감재와 같이 빈틈 생기지 않도록 설계에 많은 힘을 썼었다.
공간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늘 생각하게 된다. 빠른 일정 안에서 콘셉트를 정리하고, 경험의 구조를 짜야한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 답을 책상 위가 아닌, 내가 걸었던 골목에서 찾는다. 도시의 길과 벽, 오래된 건물들이 말없이 알려주는 것들이 있다. 사람의 필요가 만든 동선, 빛이 머무는 방향, 재료가 닳아 생긴 표정들. 그 안에는 누군가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골목은 언제나 새로운 언어를 던져준다. 벽이 바뀌고, 창의 크기가 달라지고, 간판이 불규칙하게 걸린다. 계단이 갑자기 나타나 위와 아래를 잇고, 막다른 줄 알았던 길 옆으로 또 다른 통로가 열린다. 천장과 바닥이 같은 재료로 이어져 공간의 경계를 흐리기도 한다. 인위적이지 않지만, 삶의 논리로 완성된 구조다. 나는 이런 풍경 속에서 공간의 본질적인 형태를 배운다.
공간이 오래 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교나 유행이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을 남기고, 덜어낼 수 있는 용기다. 완벽함보다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이다. 나는 골목에서 배운 이 언어들을 설계로 옮기며, 그것이 어떻게 사람의 삶 속에서 다시 확장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 글은 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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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 가르쳐준, 오래가는 공간의 방식들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