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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지 May 10. 2020

멈춘 시계 다시 돌리기  

 이것이 시작이기를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아들이 컸다. 제법 대화가 통하는 열다섯 살.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된  같았다. 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글쎄. 어렸을 때는 선생님? 대학 가서는 빨리 졸업하고 회사원이 되고 싶었어."

"왜?"

"돈을 벌고 싶었거든."

"회사는 왜 그만뒀어?"

"너 키워야 해서."

"흐음."      


싱거운 대화를 끝 아이 으로 갔다. 


십수 년 전 다녔던 직장 떠올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 마케팅 팀에 사원으로 들어갔었다. 목표는 소박했다. 대리가 되는 것. 3,4년 근무 대리가 되면 책 판권면'마케팅 OOO'이라고 이름이 들어 터였다. 무엇보다도 멋져 보였다. 베스트셀러 출간이나 분야 1위 출판사 같은 건 더 높은 직급이 될 훗날로 미루었다. 우선은 책에 인쇄된 내 이름을 보는 게 꿈이었다.


높은 비전을 가졌더라면  오래 근무했을까. 사원 2년 차에 임신을 하고 회사를 그만뒀으니 책에 이름을 못 실었다. 퇴사하던 날 대리님은 내 손을 붙잡고 신께 기도해 주셨고 이사님은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다. "미라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잘할 거야." 집에서 살림해야 한다고 사직서를 제출한 신입에게 그저 행복하라는 얘기 말고는 하실 말씀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육아를 이유로 퇴사하는 흔한 여자들 중 하나였다.  


오래된 일 생생히 기억하는 건, 지난해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쓰게 되면서 이 장면을 수 차례 되새겼기 때문이다. 수많은 브런치 작가들은 각각 다른 주제로 글을 쓰지만 바람은 한결같다. '저자 OOO' 인쇄된 책을 갖는 것. 사회 초년생 시절 가졌던  목표 마찬가지였다. 목표가 사라지면 시간도 멈추는지, 퇴사일 풍경은 고장 난 시계처럼 기억 속 어딘가 놓였다. 대신 출산과 육아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강산이 변한 지금까지 퇴사하던 날을 씹다 구차 보이려나.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아때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지 생각 본다. 이제 두 아이 십 대가 되 손이 덜 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도 입냄새를 풍기며 '엄마 안아줘요'라고 어리광을 부리긴 하지만 이제 밥을 떠먹일 필요도 없고 학교에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 전보다 시간이 천천히 가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에 한 글.     


오랫동안 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누가 물어도 "나는 다 좋아" 라며 입을 닫았다. 외출은 '유모차 끌기 편한 곳으로' 여행은 '아이들 놀기 좋은 곳으로' 음식은 '당신 먹고 싶었던 메뉴로' 고르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딱히 '나를 희생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가족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는 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게 주부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고부터 '나'에 집중하게 되어 좋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 '나'의 경험을 떠올리고, 하고 싶었던 말, 고 싶었던 것,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내 본다. 마흔 살쯤 되면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웃을 돌아보며 살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쑥스럽다. 그래도 거리를 두고 자신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남을 이해하는 능력도 생긴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씩 짧은 글을 써 나갈 때마다 오래전 원했던 '내 이름 인쇄된 책'에 다시 다가가는 기분이 든다. 아이는 왜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라고 물었을까. "엄마는 앞으로 뭐가 될 거야?"라고 물어도 되는데. "작가가 되겠다" 말은 감히 못 하겠다. 지금은 '나'를 모아 글 짓는 데 만족한다. 소소한 일상의 주인인 나를 돌보는 마음으로 쓴다. 그렇게 욕심 없이 쓴다면서도 나는 내 이름이 인쇄된 무엇을, 손에 쥘 날을 내심 꿈꾼다. 이것이 시작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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