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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Mar 07. 2024

나의 '몰입'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고1 때 캐나다로 이민 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의 주말은 늘 알바와 함께였다. 최저시급이 고등학생도 어른과 같았으므로 어린 나이에 꽤 짭짤한 수입을 벌 수 있었다. 한 살 위에 언니와 나는 열심히 알바해서 형제 5명과 엄마 아빠까지 일곱 식구의 생활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시절부터 들이는 시간대비 돌아오는 결과에 대한 생각을 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영어도 못하고 수학도 못하고 잘하는 과목 하나 없는 내가 공부를 따라가기 위해 들여야 하는 적정 시간. 생활비를 벌어야 하지만 또 너무 많이 벌면 몸이 힘드니 필요한 만큼만 일해야 하는 적정 시간. 드라마와 예능도 보고 싶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빨리 봐야 하니 가끔 건너뛰기를 하면서 즐기는 쉬는 시간. 연애도 해야 하는데 앞에 세가지도 포기할 수 없으니 나의 상황을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친구를 사귀는 시간. 이 모든 시간들 때문에 한가지에만 미친 듯이 '몰입' 할 수 없다 생각하며 살았다.


내가 대학에서 A를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주일에 2-3일씩 하는 알바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평균 점수 보다 조금 높은 내 성적을 잘하고 있는 거라며, 그런 식으로 정신승리하며 대학생활을 했다. 그러다 졸업을 했고 더 이상 알바생인 아닌 직장인이 되었다. 회사일은 '몰입'에 대상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들이는 시간과 돌아오는 결과를 생각하며 적절한 포인트를 가늠 하며 일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주어진 오롯이 내 시간인 주말을 즐겼다.


그렇게 살다 대학 때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둘이나 낳고 맞벌이로 살았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네가 회사를 1순위로 놓고 일해봤으면 좋겠어."라고. 남편은 내가 회사에서 더 쟁취적으로 성장하길 원했다. 아마 그게 그 시절 남편이 회사를 생각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해서 인정받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길 원했다. 그러면서 옆에서 집안일과 아이들, 회사일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보며 눈 딱 감고 회사를 1순위로 놓아보라 했다. 그 당시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뭔가 가능하지 않는 일을 두고 마치 내가 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결국 회사를 1순위로 놓고 살아본 적 없이 회사를 퇴사했다.


퇴사 후, 엄청난 몰입을 경험한 적이 있긴 하다. 우리 가족은 다 같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는 중이었다. 나는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었다. 결국 남편이 한마디 했다. 그 책 언제 끝나냐고. 엄청난 몰입은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못했고, 지금이 밥 먹을 시간인지 아닌지도 덜 중요해졌으며 퇴사 후 집에서 같이 지내는 남편이 심심한지 않은지도 관심 밖이 되었다. 회사일을 이렇게 몰입해서 했다면 돈을 더 잘 벌었으려나 모르겠다. 회사일은 재미가 없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몰입을 하지 못했을 거라 상상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긴 하다.


요즘 좋아하는 민화를 그릴 때도 똑같은 모란도를 몇 달째 그리고 있는 이유가 있다. 나는 집으로 그림을 들고 오지 않고 일주일에 두 시간 딱 한 번만 화실에 가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집으로 들고 와 몇 시간이고 그림에만 몰입해 보고 싶지만 아이들이 두 눈 크게 뜨고 달려들 것이 불 보듯 뻔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낮시간에 하던 유치원생 영어 가르치기 알바가 끝났으니 집에 가져와 봐야겠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아! 지금 좋은 글 감이 떠올랐어!'인 순간에도 내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우선순위가 된다. 가끔은 진정한 몰입은 싱글들만 가능하던지 딩크족들만 가능할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라면 내가 몰입하는 시간동안 다른 가족들이 나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작가들은 잠깐의 30분, 또는 1시간 안에 아주 멋진 글을 써내기도 한다. 이것도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걸까. 나는 아직 훈련 중이라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도 적당한 수준의 글을 써내며,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처럼 아주 미세하게 좋아지고 있다 믿으며, 여전히 정신승리 중이다.

(그러면서 이 글은 몰입해서 30분 만에 썼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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