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퍼의 북리뷰
'정의’ 상실 시대, 맹자에서 희망을 찾다
양평군 용문면 중원리 556번지. 먼 친척뻘 되는 할머니의 요양병원이 위치한 곳이다. 지난 여름 방문했을 때도 증축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올해도 여전히 공사 중이다. 수용해야 할 노인의 증가 속도를 감안한다면 요양병원이 1년 내내 공사 중이라 해도 가히 이상할 노릇은 아니다.
올해로 아흔 둘이 된 친척 할머니는 혼자서는 식사조차 할 수 없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계신다. 새해인사를 드리니 어떻게 이 빙판길에 멀리까지 찾아왔느냐며 기어코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만원 지폐 한 장을 꺼내 쥐어주신다. 나이 들면 정신도 함께 늙으면 좋을 텐데 여전히 명징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더 서글픈 일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인들에게 겨울은 특히나 혹독한 계절이다. 춥고, 외롭고, 마음이 쉬이 강퍅해지는 까닭에서다. ‘추워 죽겠다’, ‘외로워 죽겠다’는 노인들의 단골 엄살이 이제는 더 이상 엄살로 끝나는 시대가 아니다. 보일러 땔 돈이 없어 얼어 죽거나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는 냉혹한 우리의 현실을 대변한다. 대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새로운 지도자의 선출과 노동자의 잇단 자살,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가 배제된 정책들…. 새해 벽두부터 온통 희망을 앗아가는 뉴스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의로움의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즈음하여 다시 맹자를 읽고 있다. 맹자는 ‘남이 나에게 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것이라고 설파한다. 사회라는 것은 결국 인간관계의 지속적인 질서에 의해 정립된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거나 양보와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기란 쉽지 않다.
먹고 사는 사활적 경쟁에 내몰리는 작금의 현실에서 ‘정의’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정의’ 없이 희망도 없다. 진심이 담긴 정의로움은 뿌듯함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부디 올 한 해는 각자 뿌듯함으로 채워나가는 한 해 계획하시기를 바란다.
책 읽는 노가다를 꿈꾸며
어렸을 때 엄마가 학교 앞 사거리에서 야채장사를 했다.
그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어 수많은 날 가슴 졸이며 그 길을 피해 다녔다.
아빠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일에 매달렸고 농한기인 겨울에는 ‘노가다 십장’으로 추위에 시달리며 힘들게 일했다. 엄마아빠는 누구보다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웠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부모님 직업을 떳떳하게 말할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어떤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는지에 따라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더벅머리 소년 황상과 정약용의 만남을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스승 정약용이 내린 짧은 글(삼근계) 한 편에 고무된 이후 황상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듯 어떤 만남은 놀라운 계기를 마련해 준다.그때부터였다. 떳떳한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부모님의 직업은 절대로 내가 바꿀 수 없지만 내 직업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내 곁엔 좋은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몸소 가르쳐준 멘토가 있었다. 삶의 순간순간 어려운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늘 책을 통해 해답을 찾곤 했다.
황상은 정약용을 끝까지 섬긴 유일한 제자다. 그만큼 각별했던 제자 황상에게 스승 정약용은 의식이 혼미한 중에도 친필로 ‘황상에게 줄 목록’을 작성했다. ‘규장전운’, 붓 한 자루, 먹, 부채, 연배 그리고 여비 두 냥. 더우면 부채를 부치고 힘들면 담배도 한 대 피우면서 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란 스승의 깊은 뜻이 담긴 선물목록이었다. 눈앞의 생계를 위해 잠시 공부와 거리를 두었던 황상이 다시 붓을 잡고 먹을 갈게 되었음을 미루어봄 직하다.
물론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삶을 바꾼 만남’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황상이 아무리 이름 없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었다 해도 서당에 나가거나 스승을 두고 가르침을 받을 정도의 돈은 있는 집 자식이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과 탤런트 정우성. 이 둘은 판자촌 출신이지만 ‘공부’와 ‘재능’을 통해 사회적 계층이동에 성공했다. 그러나 요즘은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시대다. 계층 간의 경제력 차이에서 비롯된 교육의 질적 차이로 실력의 격차가 점점 더 심하게 벌어지는 까닭에서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가난은 대물림된다.
지난해 출간된 사회학자 조은의 책 ‘사당동 더하기 25’는 한 철거민 가족의 생애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빈곤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이야기는 결국 배우 정우성처럼 타고난 외모나 재능을 살려서 연예인으로 성공한다면 또 모를까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용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구조에 대해 백날 개탄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먼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대한민국, 특히 농촌지역의 20~30대 청춘을 보면 가끔 안쓰러울 때가 있다. 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하고 싶은 것 자체가 없다. 남들 다 가니까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고, 피씨방을 전전하다 스무 살이 되면 군대를 간다.
제대한 후에는 일용직이나 한시적인 직장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서른 살 즈음부터 인력시장에 투입돼 노가다의 삶을 산다. 부모 잘 만난 친구는 땅 한 뙤기 팔아 호프집을 차리기도 한다. 대학을 졸업한 몇몇은 공무원이 되기도 하는데 심지어 그들도 자기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거나 무언가 지금과 다른 새로운 직업을 갈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추위에 떨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오뎅 국물’을 권하는 노점상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잔돈이 모자란 사람에게 200원은 그냥 넣어두라고 말하는 철가방, 그리고 책 읽는 노가다, 얼마나 멋진가. 무슨 일을 하는지보다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책 속엔 항상 기회가 있다. 삶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그 기회를 부디 놓치지 않길 바란다.
봄날은 간다? 봄날은 다시 온다!
지난 설 연휴에 좀처럼 잘 울지 않는 조카 녀석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다. 저보다 세 살 어린 이종사촌 동생이 ‘형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대며 놀린 것이 발단이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이 타인에게 발각되면 창피해한다. 조카 녀석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만큼 싫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그토록 부끄러운 일인가?
최근에 책을 대여섯 권 읽었다. 공교롭게도 대부분 ‘사랑’에 관한 것들이었다. 한바탕 조카의 짝사랑 눈물소동을 겪으면서 다시금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요즘 청년들을 만나보면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거나 짝짓기에 열을 올리기나 둘 중 하나로, 두 가지가 적절히 어우러진 경우를 보기 드물다.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는 부류들은 지금 ‘사랑’이 꼭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태도다. 짝을 찾는데 열정적인 이들은 주로 선이나 소개팅, 미팅을 통해서 이성을 만나는데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공통적인 것은 세상에 널린 게 남자고 여잔데 늘 ‘사랑할만한 상대’가 없다고 고민하는 것이다.
사랑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삶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주는 까닭에서다. 그런데 만약 여러 번의 사랑을 했는데도 삶의 지평이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거나 존재의 내공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향상되지 않았다면 그건 좀 의심해 봐야 한다. 사랑이 삶을 고양하기는커녕 존재의 능력을 떨어뜨리는데 일조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몽땅 털어 여자친구 명품가방 사주는 데 할애하는 고등학생, 그런 애인의 선물을 당연하게 받는 여학생, 무슨 무슨 데이(day)나 기념일에 주고받는 선물과 이벤트에만 집착하는 대학생 연인을 보면서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무지가 역사에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노라고. 이를 증명하듯 요즘 서점에는 사랑에 대한 매뉴얼이 담긴 책이 무수히 많다. ‘사랑받는 여자들의 27가지 좋은 습관’, ‘3년 안에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그대에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사랑하라’, ‘더 오래 예쁘게 사랑하는 팁’ 등등.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런 책은 진짜 사랑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과서를 바탕으로 사랑이란 과목을 공부해야 할까? 사랑학개론의 가장 위대한 교과서는 바로 인문고전이다. 인문고전의 숨어있는 핵심이 바로 ‘사랑’이듯 철학이 담긴 고전에는 사랑의 비결이 담겨 있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의 저자 고미숙은 말했다. 이상형을 찾아 헤매다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만나지는’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시절인연이며 그러한 상대를 만나면 구체적인 행동방식은 저절로 결정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시절인연을 만나더라도 그 사랑이 삶에 긍정적 기운을 미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책을 읽어야 하는 것. 봄 햇살 아래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 연인의 모습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왜 나는 항상 똑같은 패턴으로 연애가 끝나는가? 왜 나는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한 모태솔로로 지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궁금하다면 인문고전을 펼쳐라. 돈 쓰는 소비지향적 데이트 대신 걷거나 자전거를 함께 타며 몸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줄 ‘에로스 혁명’에 대한 조언들이 가득할 테니. 멋지게 사유하는 힘의 원천, 사랑에 대한 해답은 결국 고전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봄이다. 해마다 소동파는 봄이 가는 것을 서러워했다지만 봄은 언제나 그 서러움을 용납하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봄은 또 다시 찾아온다는 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떠난 것과 다시 오는 것, 어느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는 각자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지리라. 이 봄, 떠날 것을 미리 염려하기보다 다가오는 봄에 대한 희망으로 맞아보는 것은 어떨까.
양평 시민의 소리, 칼럼 기고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