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예찬
꽤 좋아했는데, 매회 챙겨보지는 못했다. 당시 채널권 독재자였던 아빠는 주말밤 8시에 가족과 모여 보기에 푸른안개는 적합하지 않은 '거지깽깽이'같은 드라마라며 여지없이 채널을 돌리셨다. 우리아빠같은 수많은 채널독재자 아버지때문에라도 이 드라마 역시 이미숙과 류승범이 열연했던 '고독'만큼 시청률이 낮지 않았을까 싶다(하지만 둘다 나의 페이보릿 드라마다).
드라마 <푸른안개>는 '어디 할짓이 없어 딸같은 애랑 바람이 났냐'식의 용서 못할 불륜이나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지않겠는가'식의 사랑예찬론으로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아빠의 외도를 알게 된 어린 딸과, 새파랗게 어린 여자에게 남편을 뺏겨버린 마흔둘의 경주(김미숙), 무기력하던 삶에 청량제 같은 사랑을 만난 40대의 성재(이경영), 사랑의 열병을 앓는 스물셋의 신우(이요원)의 입장이 될 수도 있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 수 있다. 타인의 사랑을 자기멋대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안드레아 리우의 La Vie est Belle
드라마는 보지 못했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엔딩곡으로 사용되었던 이 곡을 듣기 위해 나는 드라마가 끝날 시간에 맞춰 아빠의 리모콘을 뺏어들고 TV앞에 바짝 앉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곡은 드라마의 작곡가 최완희씨가 왈츠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안드레아 리우의 "La Vie est Belle"를 편곡한 작품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왈츠 2번이라고 생각했던 곡으로, 사실 Shostakovich 재즈 왈츠 2번에 버금갈 만한 음악이다. 원곡에서 느낄 수 없는 극적 긴장감과 강렬함이 가미된 이 곡은 당시 드라마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드라마의 소재가 꽤 부담스럽고 조심스럽지만, 드라마 곳곳에 스며있는 작가와 연출자의 염려와 배려는 역시 드라마에 사용하고 있는 음악을 통해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위해 음악의 쓰임새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금 느꼈던 작품이다.
소련의 국민음악가, 레닌 음악학교 교수 Shostakovich 작곡의 왈츠곡.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할때는 언제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한다.
앙드레 리우는 네덜란드 태생으로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현대의 요한 스트라우스라고 불린다.
웅장함 속에 조여오는 슬픔과, 그 가운데 희망이 '그래도 나 아직 여기 있어요' 하며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 듯한 비장한 분위기가 좋았다. 이곡을 들을때마다 아직도 이요원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의 이경영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그의 그 느끼하면서도 따뜻한 눈빛이 참 좋았는데. 저런 아저씨라면, 나도 20살 차이 나더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더랬다, 아저씨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런데 작가가 이금림이라는 분이었다니. 여태껏 노희경 작품인줄로만 알았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든다. 노희경 작가가 자기가 쓴 작품이라고 말했다가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라고 번복한것도 아닌데 혼자 잘못알고 있었던거면서 꽤 심정이 복잡하다.
Story
한 회사의 사장, 아름답고 교양있는 아내와 귀여운 딸을 둔 한 중년의 남자. 윤성재(이경영). 완벽한듯 보이지만 명목뿐인 사장에 처가의 눈치만 보는 데릴사위일 뿐이다. 어린시절 죽은 아빠를 잊지못하고 아빠를 배신한 엄마를 미워하는 어린 여자아이. 이신우(이요원). 성재는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신우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친한선배의 스포츠센터에서 댄스스포츠강사인 신우와 재회. 신우는 성재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찾는다. '우리아빠 같다....' 하지만 성재는 신우의 아빠도 아니고 한 남자일 뿐이다. 당연히 당돌하고 귀여운 여자인 신우에게 끌리게 되자...성재는 신우에게 더이상 만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신우와 성재 두사람은 서로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다시 만나게 된다.
넌 왜그렇게 겁이 없니?
-아저씬 왜 그렇게 겁이 많으세요?
마흔이 넘은 남잔 니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 나도 그래....
나이가 든다는 건 더 겁이 많아지는 일일지도. 그동안 지켜오고 가진게 더 많을테니까. 젊다는건 두손에 가진게 없어도... 젊음 하나로 겁없이 거침없이 자유롭게 무슨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 신우처럼. 주변에서 아무리 뜯어말려도 신우는 성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성재의 아내(김미숙)도 남편의 불륜을 알게되고 배신감을 느낀다. 신우를 사랑하는 민규(김태우) 역시 이사실을 알고 신우를 말린다. 그리고 함께 결혼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자고 한다. 결국 성재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도 나와 살게된다.
신우는 성재의 딸 주희를 만나고 자신과 같다는 걸 알게된다. 바람난 엄마때문에 상처입었던 자신처럼 주희도 똑같이 상처받았다는걸.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신우는 성재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민규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 이별의 아픔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난 널 만나 철딱서니없는 어린애가 됐는데 넌 날 만나 어른이 된것 같구나.
이젠... 우리 정말 헤어지는거니?
신우는 민규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성재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자신의 꿈대로 서점을 경영한다. 그리고 몇년뒤. 성재의 아내는 서점의 주인이 된 성재를 만나러 오고, 이제는 아이엄마가 된 신우는 귀국해 차를 타고 가다 성재의 차와 스쳐 지나가게 된다.
편애하는 대사
신우 :(울먹이면서)그렇지만 ...언니한테 이런 경우 닥치지 않았다구 함부로 말하지 마.
내가 작정하구 가정 있는 남자 유혹한 것도 아니구...세상에 태어나 처음 사랑한 남자가.. 운 나쁘게두
불행하게두 유부남이었던 거 뿐야.
경주 :(성재 뺨을 치면서 소리지른다)내가 그따위 말 들으려구 이렇게 참구 있는 줄 알어?
(낮게 분노로 눈에서 불꽃이 튀면서 )나랑 헤어져 그 기집애랑 살구 싶어서? 어림없어.
당신 내 옆에서 한 발자국도 못 가.
내 옆에서 늙어 죽어
성재 :(커피컵 만지작 거리면서).... 이 나이까지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내 존재두 모른 채숨 가쁘게 달려 왔어요. 어느 날 아침, 눈뜨고 일어나 거울을 보니까 머리엔 백발이 성성해 있구 (씁쓸하게 웃고).....인생이란게 참 덧없는 거더라구요. 멈춰서서 돌아보니까....내가ㅡ성공이라구 믿었던 것들이...행복이라구 믿었던 것들이....부질없었어요. 사표랑 그 애 연관짓지 마십시오. 세상엔 누구 눈치보지 않구...자기 의지로 사는 삶두 있다는 거요.
성재 :(화가 난 채)같이 사는게 다가 아니기 때문에 하구 싶어두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그 끝이 환히 다 보이기 때문에요. (화가 난 채 )선배가 말했잖아요? 안개가 걷히면 어떻게 될지.
그 애야말루 보게 되겠지요. 안개가 걷히면...그 애가 사랑했던 남자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후줄근하게 늙은 중년 남자일 뿐이라는 걸.
경주 :그렇지만 니가 사랑이라구 믿구 있는 건 진짜 사랑이 아냐. 한 순간의 유희구 장난일 뿐이야.
지나가면 언제 그랬더냐 싶게. 몇 달만 지나두 내가 그때 왜 그랬나? 제 정신 아니었구나.
미쳤었구나 그렇게 생각될지도 몰라. 사랑이란건 값싼 감정 놀음이 아냐. 신성한 의무구 아름다운 책임이야. 행복한 한 가정 파탄 낸 죄, 사랑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면죄부 받을 수 있다구 착각하지 마. 넌 영원히 젊을 수 있을 거 같니? 나두 한 때는 너처럼 젊구 아름다운 시절 있었어. ...윤사장이 탐내고 있는 그 젊음 .. 길지 않아. 젊음이라는 무기...너처럼 함부로 쓰라구 있는 거 아냐.
성재: 멈춰서 돌아본까 내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성공이라고 믿었던 부질없었어요.
뭐하나 내 손으로 할 수 있는게 없었어요.
선배: 자네말이야. 짙은 안개속에서 길을 잃은거야. 안개속에서 환상을 본거라고, 명심해.
안개는 걷히게 되어있어.
성재 :(눈물이 가득 고이면서 목이 메어서)어떤 바보가 이 나이에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짓 저질러
모든 걸 다 잃구 싶겠어요? 선배 말대루 안개가 걷히면 참혹한 현실만 남을 지두 모르죠.
다 알면서두...그 앨 사랑한건 ...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눈물이 떨어지면서 손으로 눈을 가린다)
성재 :널 첨만났을 때, 넌 ...세상에 무서운게 없는 사람이었다. 너무나 자유로와서 두려움이 뭔지두
모르는 어린애였어.. (바라보고 있다가 ) 난 널 만나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가 됐는데....
넌 날 만나 어른이 된거 같구나 .
성재 :내가 누군지 모르구 살았던 지난 세월이 안개속이었어요. 이제 비로소 ....안개가 걷히고 내가 서 있는 곳을 알게 된겁니다. (커피 마시고 )세상 사람 모두가 날 욕하겠지요. 자아 찾을 데가 그렇게 없어 여자를 이용했냐구 .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한텐 대답할 말 없습니다.. 난 단지 한여잘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자신을 찾은 것 뿐. 변명하구 싶지도 않아요. 그앨 사랑한것도 더없이 소중했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내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건 그건...사랑이 남긴 선물이었어요 ..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