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nny Sep 16. 2023

계륵이라고 하기엔 좀 소중했던 사이


너나 나나 서로를 계륵처럼 대했다. 나 갖기는 좀 그렇고 남 주기도 좀 그렇고. 깔끔한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내 인생에서 그런 관계는 별로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영부영 지내도 괜찮다는 게 좀 신기했다.

사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만났는데 나중엔 아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마음이 너덜너덜해 보이는 너한테 시간을 주고 있던 건데, 넌 몰랐겠지.


나는 너를 꽤 아꼈다. 아니 나를 좋아해 주고 예뻐해 주는 너를 아꼈지. 네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예쁘다고 할 때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래서 맘을 좀 줘볼까 싶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마음이 커질 것 같아서 멈췄지만. 이 나이 먹으면 상처받을 게 뻔한 관계에서 마음을 누르는 것도 가능하다. 나이가 준 선물인지 비겁함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종종 거짓말을 했고, 나는 그게 눈에 보였다. 귀여운 허세였던 적도 있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했던 적도 있는데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지만 그냥 넘겼다. 가끔 귀엽기도 했고.


너는 내 마음을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건 당연한 거였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었으니까. 그냥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딱히 뭔가 더 기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랑 한 번도 안 싸워본 게 좀 아쉽기는 하다. 한 번 싸워보면 머리털이 쭈뼛 서고 재밌었을 텐데. 무엇으로 규정지어지지 않는 사이에서는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싸우는 것도 이겨서 쟁취하고 싶은 게 있어야 가능한데 난 너한테 이겨서 갖고 싶은 게 없었다. 안 싸워도 충분히 내 손에 쥐여줬으니까. 그 이상 기대하기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나는 선을 넘지 못하는 성격이고 너는 선이 모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안전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너는 아마도 꽤 보였을 내 선을 넘나들며 눈치를 많이 봤고.


너처럼 좋으면 좋은 대로 고민이면 고민 인대로 표현하면 어땠을까. 나는 이 관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자처럼 서있었다.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한 무서움을 아는 사람이라 좋았다. 마음의 무게를 너무 잘 아는 거지. 그 선택이 내가 아니라는 게 명확해지는 순간 자존심이 상했을까 아쉬웠을까. 둘 다였던 것 같다.


사실 너랑 친구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거야 말로 너를 계륵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너는 나한테 한 계절 동안 고마웠던 사람이고, 우리가 친구로 지내도 나한테 계속 뭔가 주려고 할 거다. 모르는 척하며 받기만 하기에 나는 꽤 양심이 있고, 너한테 뭘 주려고 하면 너는 부담스러워하겠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던데 너는 왜 나를 열 번이나 찍고 넘어가길 바라진 않았는지 가끔 궁금하다. 네 호의를 갚을 길이 없는 게 오래 마음에 남겠지.


내가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이고 잃어도 괜찮은 게 무엇인지 알면 인생이 좀 명확해진다. 우리는 그 선택을 했다. 둘 다 꽤 좋은 사람이라 욕심부리지 않고 남 주기로 결정한 것. 뭐 그런 것 아닐까.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많이 무너져 있었는데 덕분에 내가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인 걸 알게 됐다고 하면 믿으려나. 아무튼,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 많이 생각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