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개 키우기 왜 이리 힘든고
나는 개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걸 너머서 사랑한다.
'개'라는 존재가 없는 나의 삶과 일상은 상상이 되지 않을만큼 개와 함께하는 생활은 나의 큰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가장 친한 친구가 개를 몹시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다 무서워하는 것이고 무섭다보니 싫어하게 되었다. 개가 무서워 몇 년간 우리집에 놀러오지도 못하는 친구에게 공포증을 치료해주겠다며 반강제로 매일 우리집에서 1시간을 보내게 했다.
처음에는 책상 위에 올라가서 내려오지도 못하던 친구가 한 달이 지나니 바닥에 앉기 시작하더니, 두 달째에는 개를 쓰다듬고, 세 달째에는 들어올 때 짖으며 달려드는 개를 같이 반가워한다. 그렇게 몇 달 뒤 친구는 나의 반려견 솜이가 없으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가게 된 나를 따라 직장을 때려치고 무작정 파리에 따라왔다. 그렇게 친구와 나, 솜이는 프랑스에서 6개월간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프랑스가 개를 키우기 좋다라고 흔히들 인식하고 있겠지만, 파리는 꽤나 지저분한 동네이고 대부분의 잔디밭이 개가 들어갈 수 없게 규정되어 있곤하다. 물론 서로서로 눈치를 보다 한 명이 잔디밭에 개를 들이면 금방 개밭으로 변하는 시스템이긴 하지만, 아무튼 내가 생각한 것 만큼 개들이 좋아할만한 환경이 많은 곳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왜 개를 키우기 좋다는 것일까? 그건 아무래도 '개'라는 것이 일상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침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열린 공간에서 식품을 판매하는 빵집이나 마트 혹은 특별히 조용해야 하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등을 제외한 모든 공간은 기본적으로 개가 출입이 가능하다.
지하철, 버스, 식당, 카페, 가게... 초반에는 매번 문을 열고 'ça va? mon chien?' (내 개? 오케이?)하는 짧은 불어로 가게 주인에게 허락을 맡았는데 그렇게 물으면 대부분 '대체 그걸 왜 묻는거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마치 가게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느낌?
무엇보다도 대중교통에 개가 탑승할 수 있기 때문에 어디든 함께 다닐 수 있고, 그렇다 보니 굳이 개를 떼어놓고 다닐 이유가 없다. 개가 출입할 수 없는 곳들은 입구에 목줄을 걸어둘 수 있는 고리가 있고, 거기에는 개들이 쪼르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는 난리법석을 부리던 솜이도 조기교육의 효과인지 금새 친구들을 따라 나란히 엎드려 나를 기다리곤 했다. 산책의 폭도 훨씬 넓어진다. 파리는 의외로 공원은 개들이 출입이 안 될 때가 많다. 주말에는 조금 외곽으로 지하철을 타고 나가 볼로뉴 숲이나 벵센느 숲에 가면 그만이다.
파리는 정말로 개 천국이다.
개가 살기 좋아서 '천국'이라기 보다, 개라는 존재가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천국이다. 파리에서 내가 받은 다른 인상들도 그러했다. 노숙자들의 '천국', 파업의 '천국', 거지의 '천국'.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샤넬, 마리앙투아네트, 에펠탑같은 아름답고 럭셔리한 이미지는 곰국에다가 소금 간을 하듯이 군데군데 조금씩만 존재할 뿐이다.
이게 어떻게 선진국이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말도 안되게 지저분하고, 위험하고, 더럽고, 불편하고, 느리고... 파리의 지하철에 비교하면 한국의 지하철은 5성급 호텔이다. 공공장소에는 노숙자와 거지가 가득하다. 파리에는 넘쳐나는 개만큼이나 노숙자가 많다. 노숙자 천국이다. 노숙자들의 삶이야 어느 나라든 퍽퍽할테니, 그들이 살기 좋아서 '천국'이라기 보다, 그들의 존재가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해서 천국..
어라? 그런데 그 '당연하게 존재할 권리'라는 것, 생각보다 흔치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천국'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라기보다, 무언가의 존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바라는 천국은 그저 존재할 권리 아니였던가?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닐 권리, 안전할 권리, 이동할 권리, 혐오당하지 않을 권리..
한국에 돌아온 뒤 너무나 깨끗한 서울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매끈하고 부드럽다. 불편한 것들을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꽁꽁 싸메진 채 어딘가로 치워져 있다는 것이다. 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볼 때 우리는 그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파리에 있을 때는 외출을 주로 함께 했으니 따로 산책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고 개를 나간 적이 없는데, 이제는 '산책'이라는 것을 따로 시간을 내서 해야한다. 서울에서는 차 없이 어디 좀 괜찮은 데에 반려견을 데려갈 수도 없다. 멀리 나가지 않으면 넓은 잔디도 없고, 어쩌다 마주친 개 친구들은 다른 개가 낯설기만한지 으르렁 댄다.
새삼, 한국에서는 사료도 왜 이렇게 비싸지? 목줄도 간식도 너무 비싸다. 프랑스라고 꼭 쌌던 것 아니지만, 싼 것도 있었는데.. 반면에 온갖 신박한 반려동물 용품들은 쏟아진다. 맞춤형 생식, 반려견 샤워전용 타월, 각종 영양제에 뭐에.. 반려동물도 이제는 빈익빈 부익부 시대인가? 어떤 개들은 유치원도 다니고 스파도 받는데, 여전히 조금만 시골에 나가면 평생을 철창 밖에 나가보지도 못한 채 불린 라면만 먹다가 죽도록 맞고 고기로 팔려 나가는 개가 수두룩하다.
파리에서 제일 신기했던 풍경은 노숙자가 개를 몇 마리씩 키우는 광경이였다. 주인 무릎에 꼭 안겨있는 개를 보고 있자니 너무 귀여워 멈춰서서 노숙자랑 수다를 떨었다.
'아 너 개는 몇살이야? 우리 개는 몇 살인데.'
'내 개는 몇 살이야. 이제 할아버지가 다됐지. 얘는 집에서 잠만 자.'
'아 진짜? 우리집 개도 주말에는 맨날 잠만 자.'
노숙자의 퍽퍽한 삶에도 또 다른 약한 존재에게 사랑을 베풀만한 여유가 파리에는 있다. 그리고 가장 약한 존재인 동물을 통해 나와 노숙자는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렇게 약자를 타자화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여기게 될 때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해진다.
파리에서는 노숙자도 개를 키운다.
서울에 돌아온 뒤로는 우연히 알게 된 개농장 구조 단체 때문에 솜이는 가족에게 제쳐두고 개농장에서 구조된 개들을 하나씩 임시보호하게 되었다. 6월부터 지금까지 클로이와 샤일로라는 사랑스러운 진돗개 2마리를 무사히 해외로 입양을 보냈고 이제는 옥이라는 진트리버(진도+리트리버)를 돌보고 있다. 지금도 현관에서 산책을 가자며 나를 째려본다.
개팔자가 상팔자다 다들 말하지만, 아니, 우리나라에서 개로 태어났으면 10분의 8의 확률로 개농장에 있거나 유기견이 되었을거다. 나머지 두 마리는 스파도 다니고 유치원도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중 한 마리도 버려질 확률이 높다. 내가 만약 그 행복한 두 마리라면 참 다행이지만, 불행한 여덜이 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불행의 정도를 낮추는 데에 힘을 써야한다. 파리의 노숙자가 기르는 개가 사실 무지하게 행복해 보인 적은 없다. 그치만 유기견의 불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임이 틀림없다.
한국의 모든 개들이 굶주리지 않고, 밖에서 묶여 자라지 않고, 하루에 한 번씩은 산책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개들에게도 최소한의 '천국'이 보장되는 사회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