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는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까놓고 보면 딱히 잘하는 것 하나 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대를 나왔다. 미대에는 태어날 때부터 숙명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은 친구들이 참 많다. 글자의 행간, 자간을 1pt씩 옮기며 희열을 느끼는 친구들, 밤새 그림만 그려도 배가 부른 친구들, 과제가 아닌데도 개인작업을 하느라 너무 즐거운 친구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성공 모델이다.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
덕후들이 성공하는 시대다. 이제는 유투브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자기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만 계속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 파충류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종일 파충류를 돌보는 영상을 올리고,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종일 식물에 물 주는 영상을 올리고, 집청소를 좋아하는 사람은 청소영상을 올리면 된다. 그래서 나도 진짜로 좋아하는 걸 찾고 싶었다. 근데 진짜로 좋아하려면 일단 좀 잘하는거여야 하는데..
끈기는 재능이 있으면 훨씬 얻기 쉽다. 누구나 자기가 잘하는 걸 계속 하고 싶지, 못하는 걸 계속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잘하는 걸 계속 하다보면 더 잘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부심이 생겨 그 일을 더 좋아하게 되고, 그러면 끈기가 생겨서 더 노력을 하고, 그러면 더 잘하고..
예전에는 내가 잘하는게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도 수시로 바뀌었다. 어떨 때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고 싶었고 어떨 때는 디자이너나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오래달리기 같은 걸 전교 1등하면 아씨 다 떄려치고 운동이나해? 하다가 또 금새 싱어송라이터를 해볼까 뭐 그런 식이였다.
다들 선택과 집중을 하라지만 대체 그 하나가 뭐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 하나를 잘못 고르면 어떻게하지? 나는 잘하는게 이렇게 많은데? 좋아하는게 이렇게 많은데?하는 생각을 했었다. 냉철하게 따져보자. 아니다. 잘하는게 이렇게 많다는 건 내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일 확률이 더 높다. 좋게 말하면 못하는 게 없는거고, 나쁘게 말하면 딱히 잘하는게 없는..
확실하게 좋아하는 것, 확실하게 잘하는 것, 자신의 인생을 바쳐도 후회가 되지 않을만한 일, 죽을 때까지 계속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사람들은 정말 행운아다. 그런 사람들은 회사를 때려치든, 사업을 하든, 디지털 노마드가 되든 결국은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그 일을 중심으로 생활이 돌아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선택과 집중이 된다.
그렇다면 딱히 아무것도 잘하는게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버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라는 고민을 참으로 오래해왔다. 고민끝에 내가 실천하고 있는 삶의 태도는 '분산과 연결'이다.
어차피 한 가지만 딱 골라서 파는 건 못할테니, 지금처럼 두루두루 산만하게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걸 시도해보는 걸 꾸준하게 하기로 약속했다(여기에서 나의 끈기이자 재능이라면 산만함이다). 선택과 집중으로 탄탄하게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대체 뭘 하겠다는거야?'라는 시선만 버텨내면 할만하다.
인생은 길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 우리의 인생은 짧아도 90년이다. 이것저것 건들면서 살다보면 그 중 몇가지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될 지도 모른다.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더라도 딱히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 한 번 건드린 분야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나가자고 생각했다. 작심삼일이여도 좋다. 작심삼일도 백 번만 하면 일년을 채운다. 그렇게 분산을 이어가다보니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시너지가 생겨났다.
전혀 다른 식으로 산만하게 퍼져 있던 각각의 관심사나 경험들이 어떤 지점에서 맞닿게 되는 일이였다.
나는 디자인 전공자이지만 글 쓰는 걸 더 좋아했다. 그렇게 계속 글을 조금씩이라도 써 왔고, 그것들이 포트폴리오가 되어 우연히 카피라이팅까지 필요한 고가의 브랜딩 작업을 다른 빵빵한 디자인 에이전시들을 제치고 따올 수 있었다. (디자인 개못함. 글도 엄청 잘 쓰지도 않음.)
영어를 못하지는 않지만 뛰어나게 잘하는 수준도 못된다. 그래도 영어만큼 쓸모 있는게 또 어딨나 싶어 작심삼일로 매번 공부하고 기회가 될 때는 번역이나 통역 알바를 해왔다. 최근에 한 출판사의 번역일에 지원했다. 한영이나 영한번역은 워낙 치열하고 인재들이 많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마침 그 출판사에서는 기존의 책들을 e-book형태로 전환하면서 번역하기 위해 편집디자인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는 프리랜서 번역가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 그 일을 따올 수 있었다. (딱히 번역도 편집 디자인도 못함. 좋게 말하면 둘 다 할 수는 있음)
어? 이거봐라.. 지금까지 쓸모없게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던 내 경험과 관심들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감이 조금 붙어 우연한 기회에 반려동물시장 창업지원과 관련된 사업을 신청했다(또 언젠가 사육사가 된다며 반려견행동과 영양을 공부했음). 아쉽게도 3차 발표에서 떨어졌지만 허겁지겁 일주일만에 준비한거 치고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한 번 해보니 사업준비라는것도 별 거 없구나 싶다.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서비스 디자인이랑 지금까지 가져왔던 오래된 관심사 하나를 붙이면 사업계획서 하나 금방 나오는구나.
딱히 아무것도 잘 하는 일이 없다는거.. 다시 바꿔 말하면 아무거나 다 시도해봐도 평타는 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가지를 미친듯이 판다고 생각할 필요없다. 시도해보고 안 되면 바꾸고, 안 되면 또 바꾸고, 그러다가 뭐 하나 얻어 걸릴때까지 하면 되는구나. 누군가는 그게 성공할 때 운이라고 말할 지 모르겠지만, 그건 또 나대로 나만의 끈기이고 노력이다. 새로운 걸 계속해서 시도하고 한 번 생긴 관심과 경험들을 비록 느린 속도일지라도 내려놓지 말고 지속한 결과.
놓지 않고 가져가던 한 가지 길이 다른 길과 만나게 될 때 분산은 빛을 발한다. 많은 것들이 분산되어 있을수록, 서로 만나게 될 확률도 높다. 밑으로 깊게 팔 자신이 없다면, 옆으로 넓게 파봐도 된다. 꾸준한 분산과 느슨한 연결도 삶의 중요한 방향성이 될 수 있다.